준비하다 예배를 놓치는 청소년부, 누가복음 10장 설교
설교 스페이스
그룹 코르티스가 첫 월드 투어의 이름을 아예 '풋 유어 폰 다운(Put Your Phone Down)'으로 정했어요. 공연장에서 휴대폰 사용을 어디까지 제한할지를 두고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고요. 화면 너머로 보는 것보다 몸으로 느낀 현장이 훨씬 오래 남는다는 쪽과,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는 것도 관객의 추억이라는 쪽이 나뉘어요.
표면 아래를 보면
논쟁의 밑에 깔린 문장은 하나예요. '기록하느라 정작 그 순간에 없었다.' 이 자각이 나온 곳이 하필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 앞이라는 게 중요해요. 가장 간절히 거기 있고 싶었던 자리에서, 자기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걸 알아차린 거예요. 찬성과 반대가 갈리는 것도 당연해요. 남기는 일과 겪는 일 중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아무도 대신 정해 줄 수 없으니까요.
수련회 찬양 시간에 폰을 들어 올린 손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 영상은 대개 다시 재생되지 않아요. 남기려는 마음이 나쁜 게 아니에요. 다만 남겨야 안심이 되는 만큼, 그 순간을 통째로 겪을 자리는 좁아져요. 그리고 이 자리에 아이들만 서 있는 게 아니에요. 음향과 순서와 화면을 챙기며 예배를 굴리는 우리도, 예배를 처리하다 예배의 대상 앞에 앉지 못한 채 예배를 끝낼 수 있어요. 아이들이 찾는 건 더 센 자극이 아니라, 자기가 정말 그 자리에 있었다는 감각이에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준비하느라 앉지 못한 자리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8-42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마르다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준비를 제일 열심히 했죠. 그런데 그 분주함 때문에 정작 집 안에 계신 분 앞에 앉지 못했어요. 렌즈로 무대를 보느라 무대를 못 보는 관객과 같은 자리예요. 주님의 대답도 일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라,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는 말이었어요. 예배를 준비하고 처리하는 사람에게 이 문장이 먼저 필요할지도 몰라요.
⚠️ 함정. 마르다를 게으름과 대비되는 악역으로 세우지 않게 해요. 본문은 일을 나무라지 않고, 앉지 못한 자리를 가리켜요.
방향 둘. 손을 놓아야 보이는 것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10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가만히 있어'는 게으르게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손을 놓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는 초대예요. 폰을 주머니에 넣는 그 짧은 결단이 공연의 밀도를 바꾸듯,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보이는지 각자에게 물어볼 수 있어요.
⚠️ 함정. '스마트폰은 악'이라는 도구 정죄로 흐르지 않게 해요. 문제는 기기가 아니라 시선이 놓인 자리예요.
방향 셋. 거룩한 자리에서는 하나를 벗어요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1-6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거룩한 자리에 들어갈 때는 몸에 걸친 것을 하나 내려놓는 동작이 있었어요. 모세에게는 그게 신이었고요. '폰 내려놓기'를 현대판 신 벗기로 놓고, 우리가 예배 앞에서 벗어 두는 것이 무엇인지로 이어갈 수 있어요.
⚠️ 함정. 예배 중 휴대폰 사용을 단속하는 규율 설교로 끝나지 않게 해요. 목적은 규칙이 아니라 임재로의 초대예요.
이번 주 예배에서 폰을 걷을지 말지는 부서마다 다를 거예요. 다만 강단이 먼저 물을 문장은 '무엇을 금지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으면 보일까'예요.
🤖 아래는 '설교 스페이스'가 이 방향으로 뽑은 AI 초안이에요. 검증된 주해와 본문 위에서 생성했지만, 강단에 서기 전 목회자의 손질을 전제한 초안입니다. 그대로 읽는 원고가 아니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출발점이에요. 당신의 본문·부서·문체에 맞춘 원고는 설교 스페이스에서 만들 수 있어요.
[AI 초안 예시] 청소년부 설교 · 누가복음 10:38-42
많은 일, 한 가지
서론
요즘 콘서트 이름이 ‘Put Your Phone Down’이에요. 폰을 내려놓자는 뜻이지요. 무대 사진을 남기고 영상도 찍고 싶지만, 화면을 보고 있는 동안 눈앞의 무대를 놓칠 수 있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기록하느라 정작 그 순간에 함께 있지 못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지요.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는데, 예배에서는 어떨까요?
예배 시간에 휴대전화 화면이 켜집니다. 잠깐 알림만 확인하려 했는데 영상 하나가 이어지고 메시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는 설교의 중요한 부분이 지나가 있습니다. 휴대전화가 나쁜 물건이라서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내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손에 든 화면에 마음을 빼앗기면 눈앞에 계신 주님의 말씀을 놓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출석하고 기록한 뒤 지나가는 일정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신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같은 집에 있고, 같은 예수님을 맞이했지만 두 자매가 머문 자리는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로 바빴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 가까이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야자와 학원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이 겹치고, 시험과 진로 걱정이 마음을 가득 채울 때 우리도 비슷한 갈림길에 섭니다. 예배 자리에 몸은 와 있어도 마음은 아직 단톡방과 성적표와 내일의 걱정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따라가며, 많은 일이 마음을 흔들 때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다시 가져오는 자리로 들어가 볼까요?
1. 예수님 앞에서 두 자매의 자리가 갈렸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이 한마디에 마르다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반갑게 맞이했고, 잘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집을 정돈하는 일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섬김 자체를 나쁘다고 하신 말씀으로 읽으면 본문을 놓치게 됩니다. 마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열심히 움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았습니다. 당시 스승의 발치에 앉는 모습은 배우는 사람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마리아는 손에 일을 들고 서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곁에 몸을 낮추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자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감정을 보여 주는 장면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자신이 배워야 할 사람임을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먼저 듣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 자매는 같은 집에 있었고 같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선 자리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겨루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자리에서 무엇이 먼저 필요한지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한 일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듣지 않은 채 움직이면 열심은 쉽게 불안으로 바뀌고, 내가 세운 기준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말씀을 먼저 들으면 내가 왜 움직이는지 다시 분명해집니다.
일상의 무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와 관계의 갈등, 앞날에 대한 고민이 엉키면 마음은 금세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계획표의 모든 칸을 채우고도 마음은 편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바쁘게 사는 일이 나쁜 게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가장 큰 자리를 무엇이 차지하느냐가 삶의 방향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봉사와 예배의 준비도 귀합니다. 그 모든 수고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는 내 힘을 증명하려고 움직이지 않고 주님께 받은 길을 따라 걷게 됩니다.
마리아가 앉은 자리는 누구도 대신 빼앗아 줄 수 없는 배움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일의 양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주님 앞에서 무엇을 많이 해냈는지가 우리 존재의 값을 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우리의 방향이 다시 세워집니다.
그래서 바쁜 날일수록 마음의 첫자리를 살펴야 합니다. 눈을 뜨자마자 일정과 알림부터 확인하면 하루가 사람과 일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성경을 펴고 주님의 말씀 앞에 머물러 보십시오. 예배 자리에서도 해야 할 일과 걱정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때 마음을 다시 주님께 돌리면 됩니다.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친 마르다를 밀어내지 않으시고, 무엇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지 드러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일의 양보다 먼저 마음을 주님께 가져갑시다. 말씀을 듣고 나면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어도, 그 일을 붙드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사람은 바쁠 때에도 가장 좋은 몫을 놓치지 않습니다.
2. 많은 일이 마르다의 시선을 사람에게 돌렸습니다
마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뒤 손을 쉬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준비할 일이 많았습니다. 음식도 마련해야 했고, 손님을 맞을 자리도 챙겨야 했습니다. 그 수고에는 예수님을 잘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수고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일이 많아지면서 마르다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누가복음 10장 40절은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라고 말합니다. 손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염려에 붙들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리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는 서운함이 담겨 있습니다. “저만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주님은 모르십니까?” 하는 마음이지요. 이어서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일을 시키라고 부탁합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섬기던 마음이었는데, 일이 겹치고 피곤해지자 동생을 판단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맡은 일보다 마리아의 태도를 더 크게 보고,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억울함을 먼저 말하게 되었습니다.
분주함은 시간만 빼앗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는 눈도 흐리게 합니다. 학교에서 모둠 과제를 하다가 한 사람이 대부분을 맡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친구가 왜 늦게 답하는지, 왜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지 계속 눈에 들어옵니다. 해야 할 과제보다 친구의 행동이 더 신경 쓰이고, 마음속에서는 억울하다는 말이 커집니다. 실제로 불공평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그 일에 붙들리면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리도 어느새 다른 사람을 고발하는 자리가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수고를 모르신 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쁜 손보다 먼저 흔들리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마르다가 왜 지쳤는지, 무엇 때문에 속상했는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분주함과 억울함을 감추며 주님 앞에 서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계속 판단하고 있다면 그 모습까지 말씀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사람을 향해 쏠린 자리에서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많은 일이 만들어 낸 비교와 불평이 주님의 말씀을 밀어내지 못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우리의 수고보다 먼저, 그 수고로 지친 마음이 말씀의 빛 아래 드러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르다에게 일을 내려놓으라고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붙든 좋은 몫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는 상황이 다 정리된 뒤에 찾는 자리가 아닙니다. 마음이 복잡하고 할 일이 남아 있을 때에도 먼저 주님 앞에 앉는 자리입니다. 가족의 말이 서운하게 들리고, 직장에서 내 수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날이 있지요. 그때 마음이 사람에게 달려가기 전에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잠시 숨을 고르고 주님께 마음을 쏟아내면, 얽혀 있던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가 트입니다. 내 안의 억울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채워져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좋은 몫은 바쁜 삶을 피해 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분주한 삶 한가운데서도 주님의 음성을 가장 먼저 듣는 자리입니다.
3. 예수님은 빼앗기지 않는 좋은 몫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이 부르심에는 책망만 담겨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분주한 손보다 먼저 흔들리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려고 애썼고, 집 안에 필요한 일을 챙기느라 바빴습니다. 그 수고를 주님이 비웃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많은 일이 마르다의 마음을 가득 채우면서 꼭 필요한 한 가지를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주님 곁에 있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여기서 주님은 해야 할 일이 하나밖에 없다고 몰아붙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붙드는 일이 너무 많아질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놓치고 있는지 보여 주신 것입니다. 눈앞에 놓인 과업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은 우리 삶에서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닙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계속 늘어나면 어느 순간 마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부터 끝내야 주님을 생각할 수 있어.”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남는 시간에 듣는 것이 되고, 주님은 내 일정의 빈칸으로 밀려나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시 스승의 발치에 앉는 일은 배우는 사람이 스승의 말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마리아는 구경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선택을 “이 좋은 편”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몫은 성적표처럼 내가 애써 얻어 내는 상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에게 열어 주시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해냈는지보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듣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발표 순서를 기다리는 교실에서 친구가 준비한 자료가 부족해 보이면, 내 머릿속은 곧바로 걱정과 판단으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중요한 설명을 시작하면, 손에 쥔 자료를 잠시 내려놓고 그 말을 들어야 다음 순서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마음을 가득 채운 걱정이 당장 모두 사라져야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걱정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사람의 평가가 바뀌어도, 하루의 결과가 기대와 달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받은 은혜는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지친 마음을 밀어내지 않으시고 자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주님이 열어 주신 좋은 몫은 성취한 사람만 차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많은 일을 넘어 우리를 붙드시고, 흔들리는 마음에 필요한 한 가지를 주십니다.
결론 및 적용
마음이 복잡할수록 무엇이 가장 크게 보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 결과, 진로에 대한 걱정, 친구의 반응이 마음을 가득 채우면 그것들이 내 삶의 방향까지 정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은 일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분주한 사람을 밀어내지 않으시고 이름을 부르시며 다시 말씀 앞에 세우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드는 힘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은혜가 먼저 있습니다.
공부해야 할 일도 있고, 친구와 풀어야 할 마음도 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일도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이 당장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들으면 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성적이 나의 값을 정하지 못하고, 친구의 평가가 나의 자리를 빼앗지 못하며, 아직 정하지 못한 미래가 나를 끌고 가지 못합니다. 주님이 내 곁에 계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오늘을 견디는 힘이 됩니다.
예배의 자리가 주님과 눈을 맞추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의 소음이 마음을 흔들 때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련한 그 고요한 자리를 잊지 마십시오. 콘서트에서 폰을 내려놓아야 무대를 바라보듯이, 우리도 손에 쥔 걱정과 시선을 잠시 내려놓을 때 지금 여기 계신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 곁에 머무는 그 자리가 우리에게서 빼앗기지 않는 좋은 몫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삶의 첫자리에 두고, 그 말씀을 들으며 한 걸음씩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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