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로 나를 설명하는 청소년, 시편 139편 설교
설교 스페이스
사람을 '테토남'과 '에겐남'처럼 두 유형으로 나누는 구분법이 계속 번지고 있어요. 배우 정호균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에겐남' 시리즈 영상이 대표적인데, '소개팅 나온 에겐남'이나 '소개팅 기싸움' 같은 상황극에 "지독하게 잘한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고요. 부서 아이들이 처음 만난 친구를 두 글자로 정리해 버리는 장면, 아마 이미 여러 번 보셨을 거예요.
표면 아래를 보면
MBTI가 그랬듯 사람들은 자신을 한 단어로 요약해 주는 이름표를 반가워해요. 이름표가 생기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한마디로 소개가 끝나고, 상대를 파악하는 데 드는 시간도 줄어드니까요. 열여섯 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는 매일 새로 풀어야 하는 숙제인데, 유형은 그 숙제를 대신 풀어 준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름표가 편한 건 나를 정확히 맞혀서가 아니라,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정리가 끝나고 나면 방향이 조용히 뒤집혀요. 처음엔 내 모습을 설명하려고 고른 이름표인데, 어느새 그 이름표에 맞춰 행동하게 되니까요. 에겐남으로 분류된 아이는 단호하게 말해야 할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테토남으로 불린 아이는 힘든 티를 못 내요. 재미로 시작한 놀이가 자기를 좁히는 틀이 되는 지점이고, 설교가 만나야 할 자리도 바로 여기예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통계가 아는 나와 지으신 분이 아는 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1-4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유형 검사도 나를 안다고 말해요. 다만 그 앎은 수많은 응답을 모아 만든 평균값이라, 통계가 나에게 맞춰지는 게 아니라 내가 통계 안에 담기는 쪽이에요. 이 본문의 앎은 방향이 반대예요. 앉고 일어서는 사소한 동작부터 아직 혀에 오르지도 않은 말까지 아신다고 하니까요. 요약된 나와 지음받은 나를 나란히 놓아 보는 각이에요.
⚠️ 함정. 유형 검사나 놀이 자체를 죄로 몰아 정죄하지 않기로 해요. 재미로 즐기는 청소년을 설교로 몰아세우면 그 자리에서 문이 닫혀요.
방향 둘. 칸에 넣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 43:1-2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유형은 나를 집단의 한 칸에 넣지만, 여기서 하나님은 지명하여 부르세요. 그리고 이름을 부른 다음에 곧바로 함께 가시겠다는 약속이 이어져요. 분류표 안에서 내 자리를 찾던 마음을, 이름으로 불리고 동행받는 자리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본문이에요.
⚠️ 함정. 이 말씀은 포로 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선언이에요. "너는 특별해"라는 개인 응원 문구로만 줄이면, 구속하신 분이 하신 약속이라는 무게가 빠져요.
방향 셋. 서로를 유형으로 먼저 읽지 않는 공동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6-17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앞의 두 방향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면, 여기서는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로 넘어가요.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는 건 겉으로 사람을 분류하던 방식을 그만둔다는 말이니까요. 서로를 만나자마자 유형으로 먼저 읽는 시대에, 교회는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읽는지 물어볼 수 있어요.
⚠️ 함정. '참된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를 상투구로 던지지 않기로 해요. 왜 그 정체성이 유형보다 견고한지를 본문으로 보여 주어야 아이들에게 닿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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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초안 예시] 청소년부 설교 · 시편 139:1-16
분류표 밖의 나
서론
요즘 친구와 이야기하다 보면 “너 테토야, 에겐이야?” 하고 서로 묻곤 하죠. 두 글자로 정리하면 재미있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금방 알아보는 느낌도 들어요. 그런데 성적표에 적힌 점수 하나, 진로에 대한 친구의 말 한마디, 단톡방에서 누가 던진 평가가 어느 순간 내 모습을 전부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하고 그 말 안에 나를 넣어 버리는 거예요. 이름표 하나가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그 이름표에 나를 맞추기 시작하면 마음이 답답해져요.
물론 유형 검사나 친구의 조언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니까요. 재미로 서로를 알아가는 일은 괜찮아요. 다만 그 몇 글자가 여러분의 가능성과 마음까지 다 말해 주지는 못해요. 한 번의 시험 결과가 여러분의 전부가 아니고, 친구의 오해가 여러분의 이름이 될 수도 없어요.
오늘 시편 139편은 “나는 어떤 유형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요. 내가 앉고 일어서는 평범한 하루와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생각까지 아시는 분이 누구인지 묻게 하죠.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시작을 돌아보며, 모태에서 자신을 만드신 분을 바라봐요. 사람은 나를 몇 줄로 요약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분으로 아세요. 내가 잘 보이는 모습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마음과 아직 펼쳐지지 않은 모습까지 아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오늘은 다른 사람이 붙인 이름표를 잠시 내려놓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선 앞에 서 보면 어떨까요? 그 자리에서 시편의 고백을 함께 들어 봐요.
1.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알고 계세요?
-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알고 계세요?
시인은 먼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해요.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이유를 시인은 자기 성격을 잘 분석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펴보셨기 때문이라고 말해요. 여기서 살펴본다는 말에는 대충 지나가며 보는 모습이 없어요. 한 사람의 삶을 눈여겨보고 마음을 기울여 아는 모습이 담겨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서 구경하듯 아시지 않아요.
그래서 시인은 아주 평범한 하루를 차례로 꺼내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신다고 해요.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 때도, 수업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하나님은 아세요. 입으로 말하기 전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도 아시고, 집에 돌아와 몸을 눕히는 순간도 아세요. 특별히 잘한 날만 골라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간까지 살피시는 분이에요.
시인은 이어서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말하고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라고 고백해요. 길은 우리가 지나가는 장소만 가리키지 않아요. 어디로 갈지 망설이는 마음과 어떤 선택 앞에 서 있는 모습까지 포함해요. 친구에게 보낼 말을 고르다가 지우는 순간, 진로를 생각하다가 막막해지는 순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속으로 흔들리는 순간도 하나님께는 감춰지지 않아요. 사람은 내가 보여 준 한 장면을 보고 나를 판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장면 앞뒤에 있는 마음과 사정까지 아세요. 이것이 하나님의 앎이에요.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말한 내용만 아신다는 뜻이 아니에요. 아직 혀에 오르지 않은 말까지 아신다는 고백과 이어져요. 그래서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도 괜찮은 척 넘긴 말, 반대로 꼭 하고 싶었지만 삼킨 말도 하나님 앞에는 숨겨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꾸며서 보여 주는 모습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에요. 말과 생각과 행동이 따로 흩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한 사람을 전체로 바라보세요.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며 시인은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라고 말해요. 앞뒤를 둘러싼다는 말은 하나님이 멀찍이 서서 관찰하신다는 뜻이 아니에요. 내가 가는 자리의 앞과 지나온 자리의 뒤를 하나님이 함께 감싸신다는 고백이에요. 안수는 손을 얹는 모습이죠. 하나님이 나를 정보로만 아시는 게 아니라 가까이 손을 대고 돌보시는 분이라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어요. 하나님은 나를 낱낱이 아시면서도 버려두지 않으세요. 가까이 아십니다.
혹시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위축되나요? 그 시선은 우리를 옭아매려는 감시가 아닙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 숨기지 않아도 돼요.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한 척하도록 아시는 분이 아니에요. 숨은 마음까지 아시기에, 감추느라 지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세요. 죄를 가볍게 여기신다는 뜻은 아니지만, 우리를 포기하려고 들여다보신다는 뜻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앎은 은혜예요. 받을 자격을 따져 가까이 오시는 게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아시고 붙드시는 사랑이에요.
그래서 시인은 이 지식을 생각하다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해요. 다 이해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나보다 나를 더 깊이 아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고, 그 앎 아래 마음을 내려놓는 고백이에요. 나를 몇 마디로 설명하는 말은 나의 일부를 보여 줄 수 있어요. 하나님의 앎은 나의 하루 전체를 품어요.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곳에 쉼이 있어요.
2.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곳이 있을까요?
그런 쉼을 알게 된 시인은 이제 더 멀리 생각해 봐요.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묻지요. 이 질문에는 두 마음이 함께 들어 있어요. 하나님에게서 잠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있고, 한편으로는 어디에서도 버려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요.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아무에게도 내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고, 설명하기도 싫어서 혼자 있고 싶은 날 말이에요. 시인은 그런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서 있어요.
그래서 하늘을 떠올려요.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스올에 자리를 펼쳐도 거기 계신다고 해요. 스올은 죽은 사람이 가는 깊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시인이 말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과 가장 깊은 곳을 모두 떠올린 거예요. 어디까지 멀어져야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을까요? 시인은 바다 끝까지 가는 장면도 생각해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라고 하지요. 새벽빛이 세상 끝까지 퍼지는 것처럼 아주 먼 곳으로 날아가도,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이에요.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디서나 감시하신다는 차가운 이야기로 끝나지 않아요. 시인은 곧바로 이렇게 고백해요.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 나를 찾아내고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길을 이끄시고, 넘어질 때 붙드시는 분이에요. 길이 잘 보일 때만 손을 내미시는 분도 아니고요.
시인은 어둠도 생각해요.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라고 하지요.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밤처럼, 친구와의 관계가 갑자기 멀어지고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어요. 진로를 정하려고 해도 내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주변 사람은 다 자기 길을 찾은 것처럼 보여서 나만 뒤처진 느낌이 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시인은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나니”라고 말해요. 어둠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에요.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는 내가 보인다는 말이에요. 길을 잃은 자리도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가 아니에요.
상황이 당장 바뀌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죠. 하지만 하나님은 문제 해결보다 우리와 함께 걷는 일을 먼저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모든 문제가 즉시 풀린다는 약속이 아니에요. 시편의 고백도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아요. 다만 고난 속에 홀로 버려진 사람이 없다고 말해요. 하나님은 내가 답을 다 찾은 뒤에 오시는 분이 아니에요. 울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그 자리에서도 손을 내밀어 이끄세요. 우리가 아직 다음 장면을 보지 못해도, 하나님의 손은 이미 그곳에 닿아 있어요.
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마다 내 감정이 하나님의 부재를 결정하게 두지 않아도 돼요. 친구 관계가 흔들리고 진로가 흐려진 그 자리에도 하나님은 계세요. 하나님은 어둠을 지나가는 나를 인도하시고, 힘이 빠진 나를 붙드세요. 가장 먼 곳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놓지 않아요.
3. 나는 내 가치를 어디서 찾고 있어요?
세 번째로 시인은 자기 가치를 바라보는 자리를 하나님에게서 찾고 있어요.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라고 고백하죠. 여기서 시인은 지금 드러난 모습만 말하지 않아요. 내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평가받지 않던 때부터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고 말해요. 내 성격이 알려지기 전에도, 성적표가 생기기 전에도, 친구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부르기 전에도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셨어요.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창조주예요. 나를 멀리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 존재의 시작을 아시는 분이에요.
시편 139편 15절은 이렇게 말해요.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시간에도 하나님의 눈에는 내가 보였어요. 16절도 이어서 말하죠.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내 모습과 하루하루가 나타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아셨어요. 내가 나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놓치지 않으세요. 이것이 시인이 자기 존재를 귀하게 여긴 까닭이에요.
수행평가로 자화상을 그릴 때 얼굴만 그린다고 그 사람이 다 담기지는 않잖아요. 그 얼굴 뒤에 있는 생각과 기억, 잘하고 싶은 마음과 감추고 싶은 약함까지 한 장의 그림에 다 담을 수는 없어요. 사람을 몇 가지 특징으로 설명하는 말도 이와 비슷해요. 재미로 살펴볼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 말이 나와 친구의 전부가 되는 순간에는 조심해야 해요.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몇 가지 말로 다 안다고 생각하면, 나도 친구도 너무 작게 보게 되거든요.
거울 속 내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작품을 실수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은 모른 척하지 않으세요. 시인은 자기 모습을 완벽해서 감사한 게 아니에요.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라고 고백해요. ‘기묘하게 지음 받았다’는 말은 모두가 똑같다는 뜻이 아니에요. 키와 얼굴, 재능과 속도가 서로 달라도 각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감사예요. 비교가 나를 흔들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실수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보지 않으세요. 나를 지으신 분의 손길이 내게 먼저 닿아 있어요.
그러니 나를 볼 때 내가 붙인 설명보다 하나님의 창조를 먼저 생각해 봐요. 친구를 볼 때도 잘하는 것 하나와 서툰 모습 하나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결론 내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은 사람을 분류해서 부르지 않으시고 지으신 존재로 아세요. 시인은 자기 생명의 시작과 아직 오지 않은 날까지 하나님 앞에 있다고 노래했어요. 우리의 가치는 평가가 끝난 뒤에 생기지 않아요. 하나님이 지으신 순간부터 귀해요.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된 사람이에요.
결론 및 적용
이제 우리를 설명하는 말이 바뀌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일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붙들면 좋겠어요.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고, 진로가 흐려지고, 친구의 말에 마음이 내려앉는 날에도 여러분의 가치는 그날의 평가로 정해지지 않아요. 사람들의 날 선 평가가 여전히 마음을 찌를 때가 있습니다. 그 아픔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말이 당신의 전부를 정의하게 내버려 두지는 마세요. 맞아요. 아픔이 곧 사라지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 말이 여러분의 이름을 대신하게 두지 않아도 돼요. 시편 139편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루와 마음을 아시고, 태어나기 전부터 지으셨으며, 흔들리는 자리에서도 붙드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나를 볼 때 사람의 분류표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먼저 바라보고, 친구도 한마디 평가로 가두지 않으면 좋겠어요. 테토와 에겐은 나를 설명하는 말일 뿐, 나를 결정하는 이름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아시는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가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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