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고 싶은데 못 끊는 청소년부, 고린도전서 6장 설교
설교 스페이스
정부가 정보통신망법 개정으로 청소년 SNS 과몰입을 규제하려 한다는 소식이 화제예요. 만 10~19세의 43%가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고, 무한 스크롤과 자동 재생, 개인 맞춤 추천과 '좋아요' 알림이 아직 충동 조절이 서툰 청소년을 성인보다 쉽게 붙잡아 둔다고 해요.
표면 아래를 보면
이번 논의의 핵심은 의지가 아니라 설계예요. 플랫폼은 광고 수익을 위해 사용자를 오래 붙잡아 두도록 만들어졌고, 그 설계 앞에서 개인의 결심은 애초에 공정한 싸움이 아니었다는 지적이죠. 이 말이 아이들에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까지는 못 끊는 자기가 문제라는 말만 들어 왔으니까요.
그런데 위로와 함께 무력감도 와요. 내가 진 게 아니라 설계에 진 거라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남거든요. 여기에 비교가 얹혀요. 피드는 남의 가장 좋은 순간만 모아 보여 주고, 그걸 종일 보고 있으면 내 하루가 초라해져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붙잡혀 있는 건 화면이 아니에요. 화면이 쉬지 않고 말해 주는 '너는 아직 부족하다'는 문장에 붙잡혀 있어요.
교육부서에서 이 주제가 유독 어려운 것도 그래서예요. 잔소리는 이미 충분히 들었고, 네 탓이라는 말도 충분히 들었거든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가한 것과 나를 지배하는 것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바울은 되느냐 안 되느냐를 묻지 않아요.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죠. 기준이 허용에서 지배로 옮겨 가요. 하루에 몇 시간까지 괜찮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질문 자체를 바꿔 줄 수 있는 자리예요. 자유는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게 아니라 어디에도 종노릇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 함정. '스마트폰은 악, 성경 읽기는 선'이라는 도덕주의로 흐르지 않게 해요. 도구가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문제라는 걸 놓치면 설교가 그대로 잔소리가 돼요.
방향 둘. 무엇이 나를 길들이고 있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본받지 말고'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가 한 짝이에요. 무언가를 끊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마음이 바뀌는 데까지 가죠. 알고리즘도 우리를 길들여요. 더 오래 머물게 하려고요. 무엇이 내 시선과 시간을 길들이고 있는지 묻는 방식으로 열면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로 받아요.
⚠️ 함정. '믿음이 좋으면 중독은 저절로 끊어진다'는 승리주의로 단순화하지 않게 해요.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함께 싸워 가는 과정이에요.
방향 셋. 흘려보낸 하루와 뿌리내린 나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3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복 있는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종일 무엇을 묵상하느냐예요. 끝없는 피드를 흘려보낸 하루와, 시냇가에 심겨 철을 따라 열매 맺는 나무가 나란히 놓여요. 이미지가 선명해서 청소년 눈높이로 풀기 좋아요. 뿌리는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는다는 점도 같이 말해 주면 좋고요.
⚠️ 함정. '그러니 피드 대신 말씀을 읽자'는 율법주의로 닫지 않게 해요. 혼자 이겨 내라는 말이 되지 않도록 함께 싸워 줄 은혜와 공동체를 같이 내놓아야 해요.
규제가 어떻게 정리되든 아이들은 이번 주에도 피드 앞에 앉아 있을 거예요. 끊으라는 말 대신 무엇이 너를 붙잡고 있는지 함께 물어보는 설교가, 그 자리에 먼저 닿아요.
🤖 아래는 '설교 스페이스'가 이 방향으로 뽑은 AI 초안이에요. 검증된 주해와 본문 위에서 생성했지만, 강단에 서기 전 목회자의 손질을 전제한 초안입니다. 그대로 읽는 원고가 아니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출발점이에요. 당신의 본문·부서·문체에 맞춘 원고는 설교 스페이스에서 만들 수 있어요.
[AI 초안 예시] 청소년부 설교 · 고린도전서 6:12
자유를 지키는 선택
서론
“잠깐만 확인해야지.” 밤에 휴대전화를 켰다가 짧은 영상을 몇 개나 넘겼는지 모른 채 시간이 지나간 적이 있지요. 내일 해야 할 일이 떠오르고 눈이 피곤한데도 손가락은 화면을 계속 움직입니다. 친구가 올린 사진에 달린 반응 하나에 기분이 올라가고 내려갑니다. 시험 성적과 진로 걱정으로 마음이 복잡한데, 게임과 영상 속으로 들어가면 잠시 잊을 수 있으니 더 오래 머물게 됩니다. 그러다 문득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요즘 청소년 SNS 과몰입과 ‘중독 설계’ 논란이 자주 이야기됩니다. 무한 스크롤과 자동 재생, 맞춤 추천과 알림은 사람이 계속 머물도록 화면을 이어 줍니다. 기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어느 순간 도구가 내 시간과 마음을 끌고 가고 있을까요? 손에 쥔 것은 휴대전화인데, 마음은 그 안의 반응과 자극에 붙잡힐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말을 들은 뒤 오늘 본문에서 자유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내게 유익한지, 무엇이 나를 얽어매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얽매인다는 말은 잠깐 영향을 받는 정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놓고 싶어도 계속 끌려가며, 내 선택보다 그것의 요구가 앞서는 상태입니다. 지금 내 시간과 기분을 가장 자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 말씀 앞에서 그 질문을 숨기지 말고 주님께 가져가 봅시다. 주님 안에서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흘러가는 힘이 아니라, 무엇에도 주인이 되게 하지 않고 주님께 속해 살아가는 길로 우리를 부릅니다.
1. 자유는 유익을 분별합니다
이제 바울의 첫 번째 말을 천천히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여기서 “가하다”는 말은 내가 선택할 수 있고, 허락된 범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하던 말을 그대로 받아 줍니다. “그래요. 모든 일을 하나하나 금지해서 자유를 빼앗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곧바로 기준을 세웁니다.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선택이 나에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자유는 욕구를 따라가는 핑계가 됩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다른 사람도 한다고 하고, 규칙에 걸리지도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내 마음을 망가뜨리고 몸을 지치게 하며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허락된 일과 유익한 일은 늘 같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유를 누리는 사람에게 먼저 자기 선택의 열매를 살피게 합니다.
학업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정작 내 과제를 놓치거나, 반대로 성적에만 매몰되어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합니다. 이때는 단순히 '가능한가'를 넘어 '이 선택이 나와 친구를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세우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자유를 가진 사람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쪽으로만 달려가지 않고,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살핍니다.
또래 집단에서의 언어생활도 돌아봅시다. 분위기에 휩쓸려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말을 던지는 것은 내 자유일지 모르나, 그 결과가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면 결코 유익하지 않습니다. 자유는 내 입술의 권한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이 상대방을 살리는지 살피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바울이 말하는 유익은 내 기분이 잠깐 좋아지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와 곁에 있는 사람의 삶을 살리고 믿음을 자라게 하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진로를 고민할 때도 남들이 가는 길을 무작정 쫓는 것은 불안을 잠재우려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타인의 시선에 내 소중한 시간을 쏟기보다, 하나님이 내게 심어주신 고유한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대세를 따르는 안도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따라 나를 바르게 성장시키는 길을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분별은 어려운 답을 단번에 맞히는 능력이 아닙니다. 눈앞의 즐거움만 보지 않고, 이 선택이 내 마음과 몸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살피는 일입니다. 내 주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건 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에서 더 깊어집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서 나를 살리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를 사랑으로 사용하도록 이끄십니다. 선택을 잘못했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눈을 열고, 지나온 선택을 돌아보게 하시며, 다시 바른 길을 고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본능의 분출이 아니라 분별의 과정입니다. 내 선택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지를 묻는 과정 자체가 곧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2. 자유는 무엇에도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라고 한 번 더 말한 뒤, 곧바로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 덧붙입니다. 자유를 말할 때 바울이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입니다. 그것이 나를 끌고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물음입니다. ‘얽매인다’는 말에는 누군가의 손에 붙들려 종처럼 끌려가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시작할 때도 멈출 때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계속 끌려간다면, 겉으로는 내가 선택하는 것 같아도 마음은 이미 다른 힘의 손에 잡혀 있는 셈입니다.
이런 모습은 아주 거창한 죄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시험 결과를 받은 뒤 숫자 하나에 하루 기분이 오르내릴 때가 있습니다. 잘했다는 말을 들으면 괜찮다가도, 기대보다 낮은 점수를 보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다음 시험에서 만회해야 한다는 불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쉬는 시간에도 마음이 계속 성적표 곁에 머뭅니다. 공부는 필요한 일이고 좋은 목표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적이 나를 움직이는 주인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점수가 나의 가치를 정하고, 사람의 인정이 나의 평안을 결정하면 마음은 그 힘에 끌려갑니다. 친구의 시선, 비교하는 마음, 잘하고 싶은 욕심도 어느 순간 나를 묶는 줄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금욕이 아니라 주권의 문제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고 불안에 떠밀려 살아가는 삶은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의 끝까지 달려가는 무모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다시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영적 통제력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얻었다는 말을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도 된다는 허락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바울은 그 생각을 멈춰 세웁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몸과 삶을 아무 주인에게나 내어주는 길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에서 바울은 성도의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며, 값으로 산 주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욕망 아래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은혜’가 시작됩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붙드셔서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받아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 얽매인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추느라 더 지친 마음을 주님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혼자서 이겨 내야 한다고 버티지 않아도 됩니다. 믿을 만한 교사나 부모님, 친구와 함께 도움을 구하는 일도 주님께서 주신 길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성적과 인정과 욕망이 우리를 끌고 갈 때에도 마지막 주인은 그것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셨고,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이든 붙잡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를 지배하던 손에서 놓여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데 있습니다.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 힘만의 약속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다시 자유를 배워 가는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자유는 단번에 완성되는 경지가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화면을 켜거나 타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주님께 시선을 돌리는 반복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다그치기보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마음을 쏟아놓는 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보시고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숨기고 싶은 욕심과 불안을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마음을 밝히시고, 믿음의 사람을 곁에 붙여 주시며, 다시 걸을 힘을 주십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이 나를 흔드는지 살피면서도 그 힘에 삶 전체를 넘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은 날에도 내 가치는 점수보다 크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날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 안에서 마음을 쉴 수 있습니다. 유혹 앞에서 넘어졌다면 주님께 돌아와 다시 도움을 구하면 됩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에게 돌아갈 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살펴보십시오. 그것을 주님의 손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서 사신 사람답게 살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로 사랑하고, 멈추고, 바른 길을 선택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결론 및 적용
이제 말씀을 마음에 모아 봅시다. 자유는 선택의 수를 늘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게 허락된 일 앞에서 그것이 나와 곁의 사람을 살리는지 살피고, 마음을 끌고 가는 힘 앞에서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방향을 다시 잡는 삶입니다. 이 길을 우리 의지로만 걸으라고 주님이 보내신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씻으셨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셨으며, 하나님 앞에 받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끌려다니는 마음을 발견한 자리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어떤 선택을 마주할 때, 집에서 혼자 마음이 복잡할 때, 친구의 시선이 나를 흔들 때에도 질문 하나를 품어 봅시다. “이것이 나를 살리는가? 지금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답게 선택하고 있는가?” 모든 답을 한 번에 찾아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주님께 묻는 사람을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끄십니다. 믿음은 욕구와 불안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내 삶의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데서 자랍니다. 오늘 우리가 누릴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흘러가는 자유가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유익을 고르고, 무엇에도 삶을 내어주지 않으며, 사랑하는 길을 찾는 자유입니다. 밤에 “잠깐만 확인해야지” 하며 휴대전화를 켜던 그 순간에도, 내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주님께 묻는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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