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진짜인지 흔들리는 청년부, 예레미야 23장 설교

설교 스페이스

AI 슬롭, 인터넷을 덮은 'AI 찌꺼기'

이 글이 출발한 요즘 트렌드예요

생성형 AI가 찍어낸 질 낮은 콘텐츠가 대량으로 쏟아지는 현상을 'AI 슬롭(AI Slop)'이라고 부릅니다.

슬롭은 원래 가축에게 주는 찌꺼기 사료를 뜻하는 말인데, 프롬프트 몇 줄로 순식간에 뽑아낸 영상·글·음악·논문·앱이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틱톡이 새 이용자에게 추천하는 영상의 약 60%, 유튜브의 약 20%가 AI 슬롭이라는 조사가 나왔고, 의미 없는 자막과 효과음을 반복하는 '브레인롯' 영상과 허위 사실을 실제처럼 꾸민 합성 영상이 특히 문제입니다.

학회조차 AI가 지어낸 인용을 걸러내지 못할 만큼 검증이 어려워졌고요.

밑에 깔린 정서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 진짜인가'라는 피로와 불신입니다.

출처: 뉴닉 데일리

프롬프트 몇 줄로 순식간에 뽑아낸 질 낮은 콘텐츠를 요즘 'AI 슬롭(AI Slop)'이라고 불러요. 슬롭은 원래 가축에게 주는 찌꺼기 사료를 뜻하는 말이에요. 틱톡이 새 이용자에게 추천하는 영상의 약 60%, 유튜브의 약 20%가 AI 슬롭이라는 조사가 나왔고, 의미 없는 자막과 효과음을 반복하는 '브레인롯' 영상과 허위 사실을 실제처럼 꾸민 합성 영상이 특히 문제로 꼽혀요.

표면 아래를 보면

청년들을 지치게 하는 건 콘텐츠가 많다는 사실이 아니에요. 판단은 계속 해야 하는데 판단할 근거가 사라졌다는 게 문제예요. 예전에는 어설프면 가짜였는데, 이제는 잘 만들어졌을수록 오히려 의심스러워요. 학회조차 AI가 지어낸 인용을 걸러내지 못할 만큼 검증이 어려워졌고요. 그래서 화면 앞의 기본 정서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 진짜인가'라는 피로와 불신으로 굳어집니다.

이 피로는 주일에도 그대로 따라 들어와요. 설교 역시 그 주에 도착한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로 도착하고, 청년은 그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본능적으로 재요. 인용 하나가 흔들리면 나머지 전체가 같이 흔들리는 감각이죠. 이번 주 강단이 마주한 상대는 불신앙이라기보다 '아무 말이나 진짜 행세를 하는 세계'예요. 슬롭이 무서운 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아무 데서도 오지 않은 말이 진짜처럼 들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이 말은 어디에서 나왔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예레미야 23:16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건 말의 양도, 말솜씨도 아니에요. 출처예요. 자기 마음에서 나왔는지 여호와의 입에서 나왔는지, 그 한 가지를 물으십니다. 슬롭을 가려내려 할 때 우리가 결국 도달하는 질문과 같은 자리예요. 청년부라면 '요즘 네 하루를 채우는 말들은 어디에서 온 말이니'라는 질문으로 열 수 있어요.

⚠️ 함정. 기술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설교로 흐르지 않게 해요.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검증 없이 소비하고 유통하는 태도예요.

방향 둘. 그럴듯함이 아니라 열매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태복음 7:15-17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양의 옷'은 겉모습이 이미 통과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겉을 더 자세히 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기준을 아예 옮기십니다. 열매로 알라고요. 조회수와 완성도로는 슬롭과 진짜가 구분되지 않는 지금, 이 기준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실적이에요. 열매는 하루 만에 맺히지 않으니까요.

⚠️ 함정. 분별을 모든 것을 의심하는 냉소로 만들지 않게 해요. 분별의 목적은 진리를 붙드는 것이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방향 셋. 나를 통과한 말이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대량으로 복제된 말은 우리를 스쳐 지나가요. 하루에 수백 개를 봐도 남는 게 없죠. 그런데 살아 있는 말씀은 나를 통과하고, 나를 찔러 쪼갭니다. '올해 나를 실제로 바꾼 말이 한 마디라도 있었나'를 물으면, 청년들은 자기 화면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스스로 발견해요.

⚠️ 함정. '살아 있는 말씀'을 내 판단이 옳다는 증거로 쓰지 않게 해요. 이 본문에서 판단하는 주어는 말씀이지 내가 아니에요.

슬롭의 시대가 앗아간 건 정보가 아니라 신뢰예요. 이번 주 강단은 더 센 반박 대신, 어디에서 온 말인지 분명한 한 문장을 들려줄 수 있어요.


🤖 아래는 '설교 스페이스'가 이 방향으로 뽑은 AI 초안이에요. 검증된 주해와 본문 위에서 생성했지만, 강단에 서기 전 목회자의 손질을 전제한 초안입니다. 그대로 읽는 원고가 아니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출발점이에요. 당신의 본문·부서·문체에 맞춘 원고는 설교 스페이스에서 만들 수 있어요.

[AI 초안 예시] 청년부 설교 · 예레미야 23:16-22

말의 출처를 묻다

서론

새벽 두 시, 침대에 누워 폰을 내리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습니다. 그렇게 만난 말들이 위로가 될 때도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왠지 더 허전합니다. 화면 속 정보의 상당수는 실체가 없습니다. 검증 없이 쏟아지는 인공지능의 데이터가 마치 진실인 양 우리 일상을 파고드는 시대입니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레미야 23장은 이 시대의 소음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분명히 짚어줍니다.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말들, 그중 얼마나 많은 말이 실제로 나를 세우는지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피드에 올라온 조언, 쇼츠에서 스쳐 간 문구, 누군가 공유한 좋은 글. 그 말들은 잠시는 괜찮은 것 같아 보여도, 아침에 일어나면 왠지 더 허전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검증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레미야 23장은 이 시대의 소음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분명히 짚어줍니다.

1. 헛된 말은 그럴듯해도 출처가 자기 마음입니다

본문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헛된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헛되다'는 말이 단순히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거품처럼 부풀었다가 터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의 출처가 어디냐 하면,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고 성경은 정확히 짚어 줍니다. 문제는 그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누구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나옵니다.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평안하리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듣기에는 참 고마운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 괜찮다는 말, 다 잘될 거라는 말. 그런데 그 말이 진짜로 그 사람을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안 보이는 곳에 덮여 있었을 뿐입니다. 나중에 폭풍이 오면 그 덮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매일 마주하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괜찮다, 잘하고 있다, 다 지나간다'는 위로가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잠시 마음이 가라앉는 듯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진통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알고 있는 어떤 알고리즘, 아니면 나와 똑같이 불안한 어떤 사람의 마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위로는 결국 헛된 것입니다. 나를 잠시 편하게 해줄 뿐, 내 안에 있는 실제 문제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마치 상처를 소독하지 않고 반창고만 붙여 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그 안은 그대로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말을 의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별의 목적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짜를 붙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스크롤을 내리며 만난 말들 중에, 나를 편안하게만 만든 말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 말이 나를 실제로 변화시켰는지, 아니면 그 순간의 위로로 끝났는지를요. 그 말의 출처가 사람의 마음이었는지, 여호와의 입이었는지 한 번 물어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이 정말 위로인지, 아니면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는 소음인지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듣고 싶은 말은 언제나 달콤하고, 달콤한 말은 늘 옳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서 나온 말은 내가 듣고 싶은 소리를 정확히 골라서 말합니다. 내가 불안하면 불안을 달래 주고, 내가 지치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은 나를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같은 길을 계속 걷게 만듭니다. 위로의 말 같지만, 사실은 나를 제자리에 붙들어 두는 말입니다. 진짜 위로는 나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진짜 위로는 나를 일으켜 세워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다시 보게 합니다. 그 길이 편하지 않아도, 그 길이 옳은 길임을 알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말 가운데, 나를 편하게 하지만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헛된 말일 것입니다.

2.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말은 폭풍을 못 막습니다

그런데 잠깐, 이 말들이 정말 그럴듯하다고 해서 다 진짜일까요? 본문은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여호와의 회의. 하나님이 뜻을 세우시고 말씀하시는 그 자리에, 과연 그들이 참석한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그 자리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평안을 약속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임박한 재앙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아무리 좋은 말, 희망적인 말이라도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 말은 폭풍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긍정적인 말, 좋은 말을 들어도 그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 삶에 닥친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좋은 말이 아니라, 폭풍도 그치게 하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내가 지금 의지하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유튜브에서 들은 조언, 친구의 위로, 내 스스로에게 하는 긍정의 말들. 그 말이 여호와의 회의에서 나온 말씀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 방법을 이미 가르쳐 줍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그 말을 그들에게 말하라 그 말에 더하거나 감하지 말라."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는 길은, 내 마음에서 나온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말씀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더하고 빼지 않고, 그 말씀 그대로를 붙들 때 우리는 그 회의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꿈을 말했습니다. 자기 마음의 헛된 꿈을 꾸고 그것을 백성에게 풀어 놓았습니다. 그 꿈은 그럴듯했지만, 그들의 상상이지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꿈은 신기하고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듣기 좋은 꿈을 꿉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문제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 그런데 그 꿈은 폭풍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말씀은 다릅니다. 그것은 때로는 듣기 어렵습니다. 회개를 부르고,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폭풍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는 반석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듣고 싶은 말과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 얼마나 다른지요. 마음이 아플 때, 누군가 "괜찮아, 잘될 거야"라고 말해 주면 참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실제로 아픔을 낫게 하지는 못합니다.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은 다릅니다. 그 말은 우리의 형편을 바꾸지는 못해도 우리 존재의 바닥을 바꿉니다. 그 말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상황은 그대로여도 우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회의에서 나온 말씀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로를 넘어서서 우리를 세우고, 우리의 길을 돌이키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한 가운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들의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회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폭풍을 막는 일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돌이킴입니다. 우리가 악한 길에서 돌아설 때, 그때 여호와의 노여움은 그치고 폭풍은 잠잠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붙들기 전에 먼저 돌이켜야 합니다. 어떤 말을 들을까 고민하기 전에,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좋은 말을 찾기 전에,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돌이킴이 있을 때,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우리를 폭풍 가운데서 건집니다.

이번 주에는 내가 붙들고 있는 생각들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점검해 봅시다. 단순히 마음을 달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된 걸음에서 나를 떼어놓는 말씀인지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내 길을 돌아보게 하는 말, 그 말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일지 모릅니다. 그 말씀 앞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 보십시오. 폭풍을 막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우리를 돌이키게 하는 그 말씀입니다.

3. 참된 말씀은 나를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게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문제인 것은 그 말이 틀렸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백성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기는커녕, 그 길이 괜찮다고, 그대로 가도 된다고 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달음질쳐서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은 그럴듯했고,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지지 않은 말이 오히려 더 듣기 좋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말들이 많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이대로도 괜찮다고, 조금만 더 쉬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들.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는 묻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은 말합니다. 참 선지자라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했을 것이라고. 참된 말씀의 표지는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가던 길이 잘못된 길임을 알게 하고, 그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이킨다는 것은 원래 가던 방향에서 몸을 돌리는 일입니다. 방향이 바뀌는 일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들춰내고, 가던 길을 멈추게 하니까요. 오히려 불편합니다. 어떤 말이 나를 실제로 바꾸었는지 떠올려 보면,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나를 기분 좋게만 만든 말이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나를 변화시킨 말. 그 말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나를 악한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돌이킴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늘 듣고, 내일 또 듣고, 그다음 날 또 들으면서 서서히 방향이 바뀝니다. 그래서 말씀은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한 번 들은 말씀으로 당장 삶이 달라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아 오래도록 일하고 있다면, 그것이 이미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꾸 잡아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들을 때, 속으로 반박합니다. 이 말은 나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내 사정을 알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면 말씀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그 말씀을 흘려보냅니다. 귀로 듣고, 고개는 끄덕이고,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돌이킴은 그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돌이킴은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몸을 돌리려면 먼저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인정이 가장 어렵습니다. 내가 그동안 옳다고 믿고 걸어온 길이, 내가 지켜온 방식이, 내가 고수해 온 판단이 틀렸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무너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너지는 자리에서 주님이 나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시는 것은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더 견고한 길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길은 처음에는 넓고 편합니다. 그런데 갈수록 좁아지고, 끝은 막다른 길입니다. 반대로 말씀이 우리를 돌이키는 길은 처음에는 좁고 가파릅니다. 그런데 갈수록 넓어지고, 끝은 생명입니다. 지금은 불편해도 나중에 감사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앞에서 가만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요즘 내가 듣고 있는 말,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습니까? 나를 편안하게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돌이키고 있습니까? 그 말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지, 내 마음에서 나온 헛된 말인지 분별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그 말이 나를 악한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지 보면 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던 길을 돌이켜라. 그 길이 편하다고, 괜찮다고 달래는 말이 아니라, 돌아서라고 부르는 말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그 말씀을 따라 몸을 돌리는 사람이 참 선지자가 듣는 그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지라도, 그 불편함을 견디고 돌아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결론 및 적용

잠들기 전, 오늘 하루 나를 채웠던 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말들이 나를 제자리에 머물게 했는지, 아니면 생명의 길로 한 걸음 옮기게 했는지 말입니다. 소음과 생명의 말씀을 가르는 기준은 오직 그 열매에 있습니다. 그 말의 출처가 사람의 마음이었는지, 여호와의 입이었는지. 분별은 복잡한 기술이 아닙니다. 그 말이 나를 악한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지 보면 됩니다. 나를 그 자리에 머물게만 하는 말은 아무리 달콤해도 헛된 것입니다. 나를 일으켜 세워 다시 걷게 하는 말, 그 말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때로 불편합니다. 내 잘못을 들춰내고, 가던 길을 멈추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그 말씀에서 눈을 돌립니다. 더 부드러운 말, 더 듣기 좋은 말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그 말씀만이 우리를 실제로 바꿉니다. 거품처럼 부풀었다가 터져 버리는 말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바닥을 바꾸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붙드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수많은 말이 쏟아지는 화면 속에서도, 그 말씀 한마디에 귀 기울이는 사람으로 서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새벽 두 시의 허전함을 채우는 것은 결국 그 말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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