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지 남을지 흔들리는 청년, 예레미야 29장 설교
설교 스페이스
최근 4년간 20~39세 인구의 수도권 쏠림이 더 심해졌다는 분석이 나왔어요. 기업분석연구소가 국가데이터처 자료를 분석해 보니, 첨단 제조업 거점 도시에는 청년층이 몰리고 전통 제조업 도시에서는 빠져나가는 'K자형 양극화'가 뚜렷하게 확인됐고요. 떠나는 쪽에서는 청년이 사라진 자리에 학교와 상권이 함께 줄고, 몰리는 쪽에서는 집값과 경쟁이 함께 올라갑니다.
표면 아래를 보면
이 통계가 청년부에 닿는 자리는 표가 아니라 주일 저녁의 대화예요. 서울로 간 친구는 방 한 칸 값에 눌려 있고, 남기로 한 친구는 동네 학원이 하나둘 문을 닫는 걸 보고 있어요. 둘이 서로를 부러워하는데, 품고 있는 문장은 똑같아요. '여기가 내 자리가 맞나.' 이건 사실 거주지 고민이 아니라 자리에 대한 질문이에요. 이동이 능력의 증거처럼 읽히는 사회에서, 남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못 떠난 상태로 해석되거든요. 그래서 청년은 어디에 있든 잠정적으로 살아요. 진짜 삶은 다음 도시에서 시작된다고 미뤄 두는 거죠. 떠난 청년도 남은 청년도 짐을 다 풀지 못한 채 살고 있어요. 강단이 답할 것은 어디가 옳은 자리인가가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어떻게 사느냐예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보내진 자리에서 집을 지어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29:4-7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자기 뜻으로 바벨론에 간 사람들이 아니에요. 끌려간 포로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집을 짓고 텃밭을 만들고, 심지어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세요.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서도 삶을 미루지 말라는 말이고, 견디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도시가 잘되기를 기도하라는 말이에요. 올라온 청년에게도 남기로 한 청년에게도 같은 무게로 닿아요.
⚠️ 함정. '하나님이 두신 자리'라는 말을 체념의 언어로 쓰지 않게 해요. 본문은 포기하고 버티라고 하지 않고, 집을 지으라고 합니다.
방향 둘. 정착하지 못하는 감각이 실패는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3-16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믿음의 사람들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부르면서도, 돌아갈 기회가 있었는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고 이어져요. 어디에 살아도 완전히 뿌리내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 그게 신앙의 표지일 수 있다는 뜻이에요. 정착과 이동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에 이 본문은 '네가 잘못된 게 아니다'라고 말해 줘요.
⚠️ 함정. '고향을 지키는 것이 더 신앙적'이라거나 반대로 '떠나야 성공'이라는 식으로 한쪽을 정답으로 만들지 않게 해요.
방향 셋. 떠남도 부르심의 형식일 수 있어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1-4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아브람의 이야기는 떠나라는 부르심으로 시작해요. 떠남 자체가 부르심의 형식일 수 있다는 뜻이죠. 다만 목적지가 더 나은 조건이 아니라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었어요. 오늘의 이동은 대개 조건을 보고 정하잖아요. 그 차이를 나란히 놓으면 이동을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질문 하나를 남길 수 있어요. 게다가 이 부르심은 복을 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너는 복이 될지라'로 이어지고요.
⚠️ 함정. 지역 소멸을 개인의 선택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해요.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결단으로 환원하면 그 말은 폭력이 됩니다.
청년부에는 떠난 자리와 남은 자리가 나란히 앉아 있어요. 이번 주 강단은 어느 쪽이 옳은지 판정하는 대신, 어느 자리에서든 짐을 풀어도 된다는 소식을 들려줄 수 있어요.
🤖 아래는 '설교 스페이스'가 이 방향으로 뽑은 AI 초안이에요. 검증된 주해와 본문 위에서 생성했지만, 강단에 서기 전 목회자의 손질을 전제한 초안입니다. 그대로 읽는 원고가 아니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출발점이에요. 당신의 본문·부서·문체에 맞춘 원고는 설교 스페이스에서 만들 수 있어요.
[AI 초안 예시] 청년부 설교 · 예레미야 29:4-7
여기서 살아가는 법
서론
늦은 밤, 휴대전화 화면에 뜬 채용 결과를 몇 번씩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떠나야 할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학교와 일터를 오가고 관계 속에서 애쓰면서도 ‘내가 있는 곳이 맞을까?’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지금의 자리가 내 선택인지조차 흐려질 때가 있지요.
요즘 청년 10명 중 9명이 수도권으로 — K자 양극화라는 말이 들립니다. 청년이 빠져나가는 지역과 몰려드는 지역의 차이가 커지고 있습니다. 떠나는 곳에서는 떠나야 하나 고민하고, 사람이 몰리는 곳에서는 버텨야 하나 고민합니다. 떠난 사람도 남은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한쪽은 기회를 놓칠까 두렵고, 다른 한쪽은 내가 여기 남아도 되는지 묻게 됩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을 성공과 실패의 표에 올려놓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예레미야 29장의 사람들도 자기 뜻으로 바벨론에 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고 싶어서 떠난 이들이 아니라 전쟁과 포로 생활 속에서 낯선 땅으로 끌려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오래 살게 될 줄 알았다면 집을 정리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겠지만, 그들은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임시로 놓인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편지를 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현재를 멈춰 세운 사람들에게 낯선 자리에서 살아갈 길을 묻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어디에 있든 그 자리를 알고 계십니다. 서울에 올라온 자리도, 고향에 남은 자리도 우리의 마음대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떠남과 머묾을 서둘러 정답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 아시는 현재를 말씀 앞에 함께 놓아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 낯선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열어 주시는지 들어보겠습니다.
1. 내가 원해서 온 곳이 아닌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본문은 포로의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밝힙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힘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빠진 사람이 없습니다. 앞장서서 떠난 사람도, 뒤에 남겨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뜻과 상관없이 끌려간 모든 사람이 말씀의 대상이었습니다.
포로가 된 일은 그들의 계획표에 없었습니다. 익숙한 땅과 사람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시야 밖으로 밀려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진 경로까지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폭력과 죄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포로의 고난조차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 우연히 흘러간 사건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리에도 하나님은 계셨고, 그들의 다음 걸음을 아셨습니다.
처음 출근한 사무실에서 내 이름이 붙은 자리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마음에 꼭 들지 않아도, 그 이름표는 내가 지금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내 사람됨의 값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주소와 직장, 학교와 관계도 그렇습니다. 지금 있는 곳이 잘 풀린 삶의 증명서가 되지 않고, 일이 꼬였다는 낙인이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먼저 성취나 실패로 불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시고 말씀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너무 빨리 판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한 시간도, 고향에 남았지만 뒤처진 것처럼 느끼는 시간도 하나님께서 모르고 지나치신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두신 자리”라는 말은 체념하고 주저앉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자리에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지금 있는 곳을 성공의 증거나 실패의 낙인으로만 바라보던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아직 자리의 뜻을 다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위치를 아시고 그곳에 말씀하시니, 낯선 자리도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대하는 첫 태도는 원망으로 하루를 닫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로에게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따라오지 않아도 밥을 짓고 일을 하고 사람을 돌보는 일상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작은 수고를 하나님은 믿음의 자리로 받으십니다. 어려운 업무 환경 속에서도 성실함을 잃지 않고, 낯선 캠퍼스에서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며, 낯선 동네의 이웃을 세심히 살피는 일상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보입니다. 그곳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씀은 환경을 좋아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내가 머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함께 구하라는 부르심입니다. 포로 된 백성이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도 평안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낯선 땅에서도 자기 백성을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오늘 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선을 시작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 내면, 우리의 삶은 조금씩 이웃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자리로 바뀝니다.
2. 낯선 자리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포로들에게 처음 맡기신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5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잠시 들른 여행객이 아니었습니다.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포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멈춰 세워 두지 않으셨습니다. 집을 짓고, 살고, 씨를 심고, 열매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낯선 땅에서도 하루를 살아 내고 먹을 것을 돌보며 삶을 이어 가게 하셨습니다.
방 한쪽에 이삿짐 상자를 풀지 않은 채 두면, 그 방은 오래 머물 곳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음도 비슷합니다. 진로가 정해지고, 관계가 편안해지고, 앞으로 살 곳이 결정되면 그때부터 제대로 살아 보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공부와 일은 임시로 견디는 일이 되고, 곁에 있는 사람도 언젠가 떠날 때까지 잠시 만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에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래를 다 알아야 오늘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맡겨진 일을 배우고, 사람을 돌보고, 내 몸과 마음을 살피는 하루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귀합니다.
6절은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라고 말하고, 아들과 딸의 가정을 통해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고 이어 갑니다. 이 말씀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 조급하게 짝을 찾으라는 압박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포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시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함께 살아갈 사람을 만나고 돌보는 일, 맡은 자리에서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일, 외로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 모두 생명을 잇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낯선 도시에서도 자기 백성의 삶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니 진로와 관계가 정리될 때까지 삶을 미뤄 두고 싶은 마음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맡기신 작은 삶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학업의 현장에서 지혜를 구하고, 생업의 터전에서 책임을 다하며, 만나는 이들을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눈에 띄지 않아도 하나님은 포로의 땅에 집을 세우시고 생명을 이어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미래를 기다리며 흘려보내는 빈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삶을 계속 자라게 하시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자기만 잘 버티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낯선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씀은 쉽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곳은 그들을 억압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이웃의 안녕을 외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읍이 평안해야 그들도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 자리만 지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의 짐을 덜고, 동네의 어려움을 살피며, 내가 받은 도움을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거창한 일을 맡아야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평화를 만드는 말을 고르는 삶이 낯선 땅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낯선 자리에서 숨겨 두지 않으십니다. 그곳에서 삶을 세우고 평안을 구하게 하십니다. 머무는 자리에서 한 사람을 살피고 평화를 선택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 작은 순종으로 그 자리를 살리십니다.
3. 내가 속한 성읍의 평안을 왜 구해야 할까요?
그 순종은 자기 삶만 붙드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들에게 뜻밖의 방향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예레미야 29:7). 여기서 ‘그 성읍’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입니다. 자신들을 끌고 온 제국의 도시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모든 일을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포로로 산다는 이유로 그곳 사람의 삶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삶을 그들이 머무는 도시의 삶과 이어 놓으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마음이 편하고 일이 순조로운 상태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이 안전하게 살아가고, 관계가 무너지지 않으며, 공동체가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 상태를 품습니다. 그러니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기도는 “나만 무사하게 해 주세요”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누군가 홀로 밀려나지 않기를 구하고, 일터에서 한 사람의 수고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기를 구하며, 내가 사는 동네의 약한 사람이 외면받지 않기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기도는 내 앞날을 붙잡은 손을 조금 펴서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대학에서 조별 과제를 하다 보면 한 사람이 말을 거의 하지 못하고, 몇 사람만 일을 떠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내 몫만 끝내고 빠져나가면 과제는 제출될지 몰라도 공동체의 평안은 자라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형편을 묻고 역할을 다시 나누는 작은 관심이 모두의 시간을 살립니다. 직장과 교회와 동네에서도 비슷합니다. 내가 속한 곳을 그저 거쳐 가는 장소로 여기면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면 불편한 사람의 사정과 지친 사람의 침묵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 공동체에게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셨고, 그 성읍의 평안 속에서 그들 자신의 평안도 누리게 하셨습니다. 내 삶과 이웃의 삶은 따로 놓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아직 흐리고 마음이 지쳐도,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하십니다. 성읍을 살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평안 안에서 자기 백성도 함께 살게 하십니다.
그 기도는 말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부당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곁을 지키며, 다툼이 일어날 때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장사하는 이는 정직함으로 손님을 대하고, 공부하는 이는 외로운 친구의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이런 행동이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로의 작은 순종을 통해 바벨론 한복판에 자기 백성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도 낯선 자리에서 같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내가 속한 곳을 떠날 날만 기다리며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두신 자리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시작합시다. 불평이 올라올 때 그 자리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선을 행합시다. 공동체의 평안을 구하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도 넓히시고, 그곳에서 살아갈 힘도 주십니다. 내가 속한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품는 길입니다.
결론 및 적용
떠날지 머물지 결정하는 일이 우리 삶의 값을 매기지는 않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사람도, 고향에 남은 사람도 자기 선택만으로 현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도 하나님은 그들의 사정을 아셨고, 낯선 땅에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집을 세우고 생명을 이어 가며 이웃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 말씀은, 삶을 잠시 멈추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 내라는 초대였습니다.
그러니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자리에서도 삶을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학교와 일터와 관계가 내 인생의 최종 목적지인지 당장 결론 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떠나는 길에서도, 머무는 자리에서도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그곳에 선한 길을 내십니다. 우리의 할 일은 떠남을 성공으로 치켜세우거나 머묾을 실패로 낮추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아시고 말씀하시는 오늘을 받아, 내 곁의 사람과 공동체를 살피며 한 걸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늦은 밤 휴대전화 화면의 결과를 몇 번씩 확인하던 마음도 주님 앞에서는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결과가 내 자리를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성급하게 미래의 거처를 확정하려 애쓰기보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상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아시는 자리에서 우리의 삶을 이끄시고, 그 자리를 통해 이웃에게 평안을 흘려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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