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게 건넨 '고마워' 한마디, 청지기 소명을 설교로 푼다면

설교 스페이스

AI에게 '고마워' 한마디가 지구를 데운다

이 글이 출발한 요즘 트렌드예요

AI 사용량이 늘며 데이터센터의 전력·물 소비와 탄소 배출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이용자들의 'GPT야 고마워' 같은 인사말도 생각보다 큰 전력 사용으로 이어진다고 말했을 정도로, 무심한 '딸깍' 한 번 뒤에도 현실의 자원이 쓰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출처: 뉴닉 데일리

AI를 쓰는 시간이 늘면서 데이터센터의 전력과 물 소비, 탄소 배출 이야기가 함께 커지고 있어요.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이용자들이 건네는 'GPT야 고마워' 같은 인사말도 생각보다 큰 전력 사용으로 이어진다고 말했고요. 화면에서는 아무 무게가 없는 '딸깍' 한 번인데, 그 뒤에서 현실의 자원이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표면 아래를 보면

이 소식이 청년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되는 건 환경 통계 때문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매일 쓰는 도구들은 마찰이 없도록 설계돼 있어요. 무한히 있는 것처럼, 공짜인 것처럼 느껴지게요. 그래서 예의로 건넨 인사말에도 값이 붙는다는 말이 낯설게 들리는 거예요. 값을 몰라서가 아니라, 값이 안 보이게 만든 화면에 익숙해서요.

그런데 반응을 자세히 보면 반쯤은 다른 결이에요. 무섭다는 말 옆에 '내 행동에도 무게가 있구나'라는 말이 같이 놓여요. 아무리 해도 세상은 안 바뀐다는 무력감 속에 살던 세대가, 자기 클릭 하나가 지구 어딘가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거든요. 무게 없는 삶은 자유가 아니라 외로움에 가까워요. 여기가 강단이 붙잡을 지점이에요. 필요한 건 더 큰 죄책감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음을 소명으로 번역해 주는 언어예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경작과 지킴은 한 문장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동사가 둘인데 서로를 붙잡고 있어요. 쓰는 일과 지키는 일이 한 문장 안에 있으니까요. 이 소명은 타락 이전에 주어졌고, 그래서 노동도 기술도 본래 죄의 결과가 아니에요. 문제는 사용이 아니라 지킴이 빠진 사용이죠. AI를 쓰지 말자는 결론으로 서둘러 갈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는 사람이 될지를 물을 자리예요.

⚠️ 함정. 정치적 환경운동 구호로 치우치지 않게 해요. 창조신학 안에서 다룰 때 이 이야기는 강단에서 힘을 얻어요.

방향 둘. 주인이 따로 있어요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24:1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청지기는 소유자가 아니라 맡은 사람이에요. 이 한 절이 바꾸는 건 사용량이 아니라 소유의식이에요. 내 편의라고 부르던 것이 실은 누군가의 물이고 어딘가의 전기였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나요. 값이 없어 보이던 것에 원래 주인이 있었던 거죠.

⚠️ 함정. 편리함 자체를 죄로 몰지 않게 해요. 본문은 사용을 금하는 대신 주인이 누구인지를 다시 말해 줘요.

방향 셋. 탄식은 절망이 아니에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19-22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여기서 피조물은 신음만 하지 않아요. 탄식하면서 동시에 고대해요. 회복의 방향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 본문은 위기 통계로 겁을 주는 설교와 결이 달라요. 지금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끝이 붕괴가 아니라 자유라고 말하니까요.

⚠️ 함정. 죄책감 주입으로 끝내지 않게 해요. 회중을 소명과 소망으로 인도하는 데까지 가야 이 본문이 제 목소리를 내요.

인사말 한마디에도 값이 있다는 말은 무겁게 들려요. 그런데 뒤집으면 우리 일상의 작은 선택이 창조 세계와 이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이번 주 강단에서 그 연결을 어떻게 불러 줄지가 관건이에요.


🤖 아래는 '설교 스페이스'가 이 방향으로 뽑은 AI 초안이에요. 검증된 주해와 본문 위에서 생성했지만, 강단에 서기 전 목회자의 손질을 전제한 초안입니다. 그대로 읽는 원고가 아니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출발점이에요. 당신의 본문·부서·문체에 맞춘 원고는 설교 스페이스에서 만들 수 있어요.

[AI 초안 예시] 청년부 설교 · 창세기 2:15

맡겨진 동산 앞에서

서론

AI한테 '고마워' 한마디를 건네는 데도 전기가 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화면 너머의 간편함처럼 보이는 그 한마디가, 실은 어딘가의 전기와 물과 자원을 소모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매일 손끝으로 '딸깍' 누르는 것들 뒤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 해보신 적 있나요?

그런데 우리는 그 세계를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검색 한 번, 주문 한 번, 메시지 한 번. 그 모든 것이 너무 매끄러워서, 그 뒤에 어떤 자원과 사람이 있는지 떠올릴 겨를이 없습니다. 편리함이란 원래 그런 법이지요. 잘 작동할수록 그 안에 들어간 수고가 보이지 않으니까요.

오늘 본문은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2장 15절,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잠깐만요. 에덴 동산이면 모든 것이 저절로 자라는 완벽한 곳 아닌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곳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맡기셨습니다. 천국 같은 곳에도 사람의 손길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인간이 돌보고 가꿀 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세상이라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 뒤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1. 우리는 무심한 '딸깍' 뒤에 숨은 세계를 놓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다'는 단순히 자리를 정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살아갈 책임을 통째로 맡기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동산에 두신 것은, 그 동산을 사람의 몫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동산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저절로 자라고 저절로 열매 맺는 곳처럼 보여도, 사람의 손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두신 자리에는 언제나 '네가 맡아 다스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딸깍'을 합니다. 검색 한 번, 주문 한 번, 메시지 한 번. 손끝이 가볍게 누르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전기를 만들고 자원을 캐고 데이터를 저장하는 거대한 세계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르는 그 한 번이, 어딘가의 전기를 소모하고 누군가의 노동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의식하지 못한 채 편리함만 누립니다. 화면 속 간편함이 실은 누군가의 값이라는 생각, 해보신 적 있나요? 그런데 창세기 2장은 인간이 처음부터 그런 무심함 속에 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동산에 두셨고, 그 동산은 사람이 돌보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편리함 뒤에 맡겨진 세계가 있다는 사실, 그것을 잊고 사는 것이 우리의 오늘 모습입니다.

오늘 하루, 무심코 지나친 일상의 풍경을 잠시 멈춰 세워보세요. 내가 누리는 편리함이 누구의 땀과 어떤 자연의 희생으로 빚어졌는지 가만히 헤아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생각이 우리를 죄책감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누리는 모든 편리함 뒤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세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면, 우리의 무심한 손끝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면, 우리가 하는 모든 '딸깍'이 그저 손끝의 가벼운 움직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세계에 내가 응답하는 방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누르는 버튼 하나하나가,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이, 결국 누군가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청지기로서의 첫걸음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요. 우리가 먹는 음식, 입는 옷, 사는 집, 그 모든 것 뒤에는 누군가의 수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를 생각하지 않고 누리는 편리함은, 우리를 점점 더 무디게 만듭니다. 감사할 줄 모르게 하고, 돌보아야 할 세계를 그저 소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무심함 속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람에게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신 말씀,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울려 퍼집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그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동산입니다. 우리는 그 동산을 향해 손을 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동산을 위해 손을 쓰는 사람으로 불림 받았습니다.

일상의 틈새마다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보세요. 내가 소비하는 물건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뒤에 숨겨진 창조주의 섭리를 발견할 때, 우리의 무미건조한 일상은 비로소 생명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하나를 찾아보십시오. 그 일이 우리를 죄책감에서 건져내고, 무심한 손끝을 돌보는 손길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관심이, 우리의 작은 수고가, 하나님이 맡기신 세계를 지키는 청지기의 발걸음이 됩니다.

2. 하나님은 그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본문은 사람에게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작하다'는 돌보고 가꾸는 일입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자라게 하는 능동적인 손길이지요. '지키다'는 해로움을 막고 보호하는 일입니다. 짐승이 들어와 훼손하지 못하게, 잡초가 좋은 것을 삼키지 못하게 지키는 경계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두 가지를 함께 맡기셨습니다. 가꾸는 일과 지키는 일, 이 둘은 성격이 다릅니다. 하나는 무언가를 자라게 하는 돌봄이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지켜내는 방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둘을 한 사람에게 함께 주셨습니다. 사람은 동산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가꾸고, 손상되지 않도록 지키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 관계, 재능,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 손에 맡겨진 동산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에게는 일터의 프로젝트가, 어떤 이에게는 가족과의 관계가, 어떤 이에게는 이 지구의 환경이 그 동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꾸는 일에는 익숙하면서도, 지키는 일에는 서툽니다. 무언가를 키우고 성장시키는 일은 보람이 있어서 눈에 띕니다. 그러나 지키는 일은 조용합니다. 아무 일 없게 하는 일이라서, 누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키는 일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동산을 가꾸되 지키지 않으면, 그 모든 수고는 결국 허물어집니다. 가꾸는 일과 지키는 일,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동산은 온전히 보존됩니다. 우리가 맡은 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것을 자라게 하는 일에만 힘쓰지 말고, 그것을 해치려는 것들로부터 지켜내는 일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약속을 귀히 여기고,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이 맡기신 동산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식입니다. 그 지킴이 때로는 보이지 않는 수고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손길을 기억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키는 일을 얼마나 쉽게 내려놓는지 모릅니다. 아무 일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지고, 그 조용한 수고를 누가 알아주지 않으니 손을 놓아버립니다. 그 사이 동산은 조금씩 상합니다. 틈이 벌어지고, 잡초가 뿌리를 내리고, 어느새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키우는 데는 열심이면서, 지키는 데는 인색했습니다. 좋은 것을 더 많이 만드는 일에 바빠서, 이미 주어진 좋은 것을 해치지 않게 하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키는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분 자신이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나를 지키시는 이는 흔들리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신다고. 우리가 맡은 동산은 작아 보여도, 그 안에서 지키는 손길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아침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의 얼굴을 지키는 일, 오래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 내가 쓰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지키는 일. 이런 일들은 세상이 칭송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맡은 동산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꾸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켜내는 일에도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가꾸는 일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지키는 일은 그 나아감이 무너지지 않게 붙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결코 혼자 힘으로 감당할 것이 아닙니다. 지키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우리도 그 마음을 닮아 오늘 하루 맡겨진 동산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3. 청지기 소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관계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잠시, 본문을 다시 들여다보면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동산에 두실 때, 멀리서 지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이끌어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명령서를 던져 주고 '가서 해라' 하신 게 아니라, 사람의 손을 잡고 동산 한가운데로 걸어가신 겁니다. 이 장면이 주는 느낌이 참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맡길 때를 떠올려 보세요. 급하고 바쁘면 전화 한 통으로 '이거 좀 해줘' 하고 넘깁니다. 하지만 정말 소중한 일을 맡길 때는, 직접 만나서 눈을 맞추고, 자리를 함께 앉아서 '내가 이걸 네게 부탁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신 일이 바로 그겁니다. 명령만 내리신 것이 아니라, 함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분은 사람을 그냥 두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니라' — 경작하고 지킨다는 말에는 손이 닿는 일이 담겨 있습니다. 흙을 만지고, 물을 대고, 열매를 따고, 해가 뜨고 지는 하루하루를 살피는 일입니다. 청지기 소명은 멀리서 내려다보는 자리가 아니라, 땅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담그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간이 촉박하고 할 일이 많아지면, 우리는 일을 '처리'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도 짧아지고, 말씀도 건성으로 읽고, 교회 봉사도 마감 시간을 맞추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맡겨진 일은 많은데, 그 일을 맡기신 분의 얼굴은 점점 흐려집니다. 마치 명령서만 받아 들고, 주인은 잊은 채 일감만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동산에 두신 것은, 일을 시키시려고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사람과 함께 걸으시고, 저녁 바람이 불 때면 동산을 거니시는 분이셨습니다. 청지기 소명은 그분과 함께 걷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일이 곧 관계의 자리이고, 관계 속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는 그분과의 동행 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반대로 그 동행이 흐려지면, 아무리 가치 있는 일도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감당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아이를 키우는 일, 병든 부모를 돌보는 일, 직장에서 맡은 일, 교회에서 섬기는 일. 그 일이 가끔은 벅차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의 양을 줄이는 것보다, 그 일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인을 먼저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세계는, 우리가 혼자 감당하라고 주신 무게가 아닙니다. 그분이 먼저 들어가 일하시는 현장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길을 따라가는 일꾼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이 많아 마음이 바쁘실 때, 그 일을 맡기신 분의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전화 한 통으로 일을 넘기지 않으시고, 직접 손을 잡고 데려다 놓으신 그 분을 말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를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경작하고 지키는 그 자리, 바로 그곳이 우리와 주님이 만나는 관계의 자리입니다.

결론 및 적용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 뒤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우리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두신 것은, 우리를 신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불신해서 일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셔서, 우리 손에 그 동산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신뢰를 어떻게 받고 있을까요. 맡겨진 일이 많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종종 그 일을 짐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나를 믿고 소중한 것을 맡겼을 때, 우리는 그 무게보다 그 믿음에 감동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맡기신 것도 같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신뢰에 응답하는 길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경작하며 지키는 청지기로 사는 것입니다. 거창한 일을 시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 있는 동산, 내가 매일 마주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손에 맡겨진 동산을 바라보십시오. 아마도 그것은 거창한 세계가 아니라, 내 방의 책상 위일 수도 있고, 내가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의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걷기 시작합시다. 우리가 그 동산을 가꾸고 지킬 때, 우리는 단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신뢰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경작하고 지키는 그 자리가, 우리와 주님이 만나는 관계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손에 맡겨진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걷는 법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바쁜 하루가 시작되면, 맡겨진 일이 쌓여 있으면, 그 자리가 만남의 자리라는 것을 놓칩니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여유를 잃어서 그렇습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아보세요. 지금 마주한 일터와 동료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특별히 부탁하신 사명의 현장임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려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같은 일을 해도 마음이 다릅니다. 짐이 아니라 부르심이 되고, 의무가 아니라 응답이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그 동산을 거니십니다. 우리가 걷지 않을 때에도 그분은 거기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이 방향으로 우리 교회 본문·부서에 맞춘 설교를 만들고 싶으세요? 설교 스페이스는 목회자가 본문만 정하면 검증된 주해 위에서 개요와 초안을 함께 준비해요. 설교 스페이스에서 시작하기 →

#트렌드설교#청지기#창조세계돌봄#청년설교#로마서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