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뒤 손편지로 돌아온 친절, 이웃 사랑을 설교로 푼다면
설교 스페이스
지난해 여름 경북 포항에서 막차를 놓친 중국인 여학생들을 한 시민이 승용차로 숙소까지 데려다줬어요. 그리고 1년이 지나 중국에서 소포가 도착했대요. 전통차와 한글로 눌러쓴 손편지, '베풀어주신 친절을 잊지 않고 있어요'라는 문장이 담겨 있었고요. 짧은 소식인데 많은 사람이 여기서 한 번 멈췄어요.
표면 아래를 보면
이 이야기가 지금 유독 오래 남는 이유는 친절이 드물어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요즘 낯선 사람은 기본값이 위험 신호에 가까워요. 도와주려다 오해받을까 봐, 괜히 엮일까 봐 한 걸음 물러서는 게 익숙한 시대죠. 그런 계산이 몸에 밴 사람들이 '차에 태워 숙소까지'라는 문장 앞에서 잠깐 숨을 멈춘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반응한 지점은 친절 자체보다 1년이라는 시차 쪽이었어요. 반응이 즉시 오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1년을 기억했고 편지지를 샀고 한글을 골라 적었어요. 그러니까 이 소식이 건드린 건 선행의 보람이 아니라 다른 감각이에요. 내가 한 일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감각이요. 우리가 조용히 두려워하는 건 손해보다 흔적 없이 지나가는 쪽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이웃은 고르는 게 아니라 되는 거예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3-37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질문이 뒤집히는 자리예요. 누가 내 이웃이냐가 아니라 누가 이웃이 되었느냐로요.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짐승과 자기 시간과 자기 돈을 썼고, 돌아올 때 더 갚겠다는 말까지 남겼어요. 막차 놓친 학생을 태운 차 안에도 같은 구조가 있어요. 계산이 끝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자리요.
⚠️ 함정. 미담의 감동으로만 소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뿌리를 놓치지 않게 해요. 착한 사람 이야기로 닫으면 본문이 아니라 인정에 기대게 돼요.
방향 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셨어요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본문의 초점은 선행의 크기가 아니라 그 선행이 닿은 대상이에요. 주님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자기를 겹쳐 두셨으니까요. 그렇다면 밤 열한 시의 낯선 유학생도, 우리 교회 주차장에서 서성이는 누군가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아닌 셈이에요.
⚠️ 함정. 우리가 늘 베푸는 쪽이라고 전제하지 않게 해요. 이 본문에서 작은 자는 시혜의 대상이기 전에 주님이 서 계신 자리예요.
방향 셋. 거두는 때는 우리가 못 정해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편지가 1년 뒤에 왔다는 사실이 이 본문과 잘 붙어요. 다만 방향을 조심해야 해요. 본문이 약속하는 건 답장이 아니라 때가 이른다는 것이고, 그 시각표는 우리 손에 없어요. 낙심하지 말라는 말은 결과가 빨리 온다는 위로가 아니라 결과를 우리가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에 가까워요.
⚠️ 함정. 선을 행하면 복이 돌아온다는 보상 거래식 번영신학으로 기울지 않게 해요. 돌아오지 않아도 행하는 것이 선이에요.
포항의 그 시민은 편지를 기대하고 태운 게 아닐 거예요. 그래서 그 편지가 더 오래 남는 거고요. 강단이 붙잡을 자리도 감동의 결말이 아니라, 결말을 몰라도 움직이는 사랑 쪽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