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터칼퇴, 눈치껏 일어서는 마음을 설교로 어떻게 만날까
설교 스페이스
'칼퇴는 못 하고 커터칼퇴해서 갈게~'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 도는 말이에요. 정시에 딱 맞춰 나가는 칼퇴는 엄두가 안 나니, 눈치를 봐가며 적당히 조금만 일찍 일어서는 걸 커터칼퇴라고 부른다고 해요. 칼보다 얇은 커터칼에 빗댄 말장난인데, 웃다가 문득 마음이 걸리는 단어예요.
표면 아래를 보면
이 신조어가 정확한 건 무엇이 깎였는지를 짚어내기 때문이에요. 깎인 건 근무 시간이 아니라 당당함이에요. 정시 퇴근은 원래 정해진 규칙인데, 그 규칙을 쓰는 데 용기가 필요해졌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 커터칼퇴는 게으름의 언어가 아니라 눈치의 언어예요.
여기에 지금 청년 직장인이 지쳐 있는 지점이 있어요. 일 자체보다 일하는 나를 누가 어떻게 보는지에 더 많은 힘을 쓰고 있거든요.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이 성과가 아니라 인상 관리로 흘러가요. 옆자리에서 가방 챙기는 소리를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따라 일어서는 그 몇 분 동안, 마음은 이미 하루치보다 더 닳아요. 야근이 힘든 게 아니라 눈치가 힘들다는 말이 여기서 나와요.
그래서 이 단어를 요즘 애들 유행어로 넘기면 핵심을 놓쳐요. 커터칼퇴 뒤에는 질문이 하나 있어요. 나는 지금 누구 앞에서 일하고 있나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눈치의 정체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언 29:25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잠언은 눈치를 두려움이라고 부르고, 그 두려움을 올무라고 해요. 올무는 벗어나려 몸부림칠수록 더 조이죠. 눈치가 딱 그래요. 잘 보이려 애쓸수록 신경 써야 할 시선이 늘어나요. 이 본문은 시선을 잘 견디는 법이 아니라, 의지하는 자리를 옮기는 법을 말해요.
⚠️ 함정. 직장의 현실을 모른 채 훈계조로 흐르지 않게 해요. 눈치 보는 마음부터 이해받아야 다음 문장이 들려요.
방향 둘. 눈가림이라는 오래된 단어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에베소서 6:6-7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눈가림'이라는 말이 이미 성경에 있어요. 보는 사람이 있을 때만 손이 바빠지는 그 태도요. 눈여겨볼 건 본문이 더 오래 일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이야기하죠.
⚠️ 함정. 이 본문이 '무조건 더 오래 일하라'는 성실 강요로 곡해되지 않게 해요. 쉼과 경계도 신앙의 몫이에요.
방향 셋. 시선을 옮기면 남는 것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은 일을 늘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나를 평가하는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바꾸는 말이에요. 그 자리가 바뀌면 오늘 할 몫을 다하고 정시에 일어서는 일에도 죄책감이 덜 붙어요.
⚠️ 함정. 성실을 근무 시간의 길이로 재지 않게 해요. 그러면 강단이 회사보다 더 무거운 상사가 돼요.
커터칼퇴라는 말은 몇 달 뒤면 다른 말로 바뀔 거예요. 그래도 남는 건 그 안에 담긴 피로예요. 강단은 그 피로를 먼저 알아준 다음에 시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어요.
🤖 아래는 '설교 스페이스'가 이 방향으로 뽑은 AI 초안이에요. 검증된 주해와 본문 위에서 생성했지만, 강단에 서기 전 목회자의 손질을 전제한 초안입니다. 그대로 읽는 원고가 아니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출발점이에요. 당신의 본문·부서·문체에 맞춘 원고는 설교 스페이스에서 만들 수 있어요.
[AI 초안 예시] 청년부 설교 · 골로새서 3:23
눈치 대신 주님 앞에
서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시계를 보게 됩니다. 딱 정시에 나가면 눈치가 보여서, 좀 있다가 나가자 싶다가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5분 먼저 슬쩍 빠져나옵니다. ‘커터칼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우리는 쉼도 눈치 보며 조금씩 얻어내야 하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안식을,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쟁취하려는 걸까요?
생각해 보면, 쉼이 원래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일이 끝나야 쉴 수 있다고 배워 왔고, 성과를 내야 휴식이 허락된다고 느껴 왔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와 ‘내가 좀 쉬어도 되나요?’ 하고 묻는 대신, 눈치껏 시간을 훔쳐 내듯 조금씩 쉼을 얻어 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쉼을 조건으로 주시는 게 아니라, 먼저 오라고 부르십니다. 일을 다 마치고 깨끗해져서 오라는 게 아니라, 지금 지친 그대로 오라고 손을 내미십니다. 이 초대를 받아들이면, 더 이상 눈치 보며 쉼을 훔쳐 내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신 온전한 안식 가운데 살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그 안식의 자리로 나아가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1. 사람의 눈치는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살까요? 왜 사람의 시선이 이렇게 무거울까요?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바울은 여기서 정말 예리한 지점을 찌릅니다. 우리가 일하면서 누구를 의식하는지, 그 대상을 정확히 들춰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듯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상사가 보고 있으면 열심히 하는 척하고, 안 보면 슬슬 빼는 태도입니다. 동료가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고, 무시하면 의욕이 뚝 떨어지는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인정과 평가에 내 일의 가치와 기쁨이 달려 있는 상태, 그것이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우리는 잘 압니다. 상사의 눈치, 동료의 평가, 회사 분위기 — 그 모든 것을 읽고 맞추느라 에너지가 바닥납니다. 마치 남의 숨소리에 맞춰 내 호흡을 조절하는 것 같아서, 결국 숨이 막힙니다. 바울은 바로 그 태도를 내려놓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의 시선이 일의 동기가 되면, 우리는 결코 온전한 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오락가락하고, 평가는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오늘 잘했다고 내일도 잘했다는 보장이 없고, 이번 프로젝트를 인정받아도 다음에는 또 증명해야 합니다. 그 무한 경쟁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쉴 틈이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더 깊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결국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 두려움이 우리를 올무에 걸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 맞습니다. 상사의 평가가 두려워서, 동료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우리는 진짜 내 마음과는 다른 결정을 내리고, 다른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흐려집니다.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 쌓여서 어느 순간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라는 질문이 올라옵니다. 그 질문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지금,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어서 그 해결책을 아주 간단하게 제시합니다. ‘주께 하듯 하라.’ 그런데 이 말이 그냥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께 하듯 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는 바로 그 순간을 주님 앞에 서 있는 시간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상사가 아니라 주님이 내 일을 보고 계시고, 동료의 평가보다 주님의 ‘잘하였다’는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 삶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일의 주인이 바뀝니다. 평가의 주인이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니까, 사람의 변덕스러운 눈치에 휘둘리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상사가 기분이 나빠도, 동료가 나를 무시해도, 내가 하는 일의 가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는 분은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늘 나의 수고를 아시고, 내가 드린 그 마음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의 시선에서 눈을 떼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분 앞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일이 짐이 아니라 예배가 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주님 앞에서 하는 일은 예배가 됩니다
그러면 일이 짐이 아니라 예배가 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 비결을 한마디로 꿰뚫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여기서 '주'는 육신의 상전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은 일의 대상이 누구인지 바꾸라고 명령합니다.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은 노동입니다. 상사의 인정을 받으려고, 동료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평가를 의식해서 하는 일은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그 일의 대상을 주님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일의 성격 자체가 바뀝니다.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은 예배가 됩니다. 마치 찬양할 때 입을 여는 것처럼,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것처럼, 오늘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써 내려가는 보고서 한 줄, 학업에서 풀어야 하는 과제 하나, 집안에서 반복되는 허드렛일까지 — 그 모든 것이 주님을 섬기는 예배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 찬양할 때 우리는 마음을 다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집중합니다. 그런데 왜 직장에서 하는 일은 '그냥 하는 일'이 되어 버릴까요? 왜 학업은 '해야 하는 숙제'로만 느껴질까요? 그것은 일의 대상을 사람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바뀌면 태도가 바뀝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하면, 그 일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형식적으로 하지 않게 됩니다. 대충 넘기지 않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종들에게는 참으로 혁명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종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하고, 주인이 있을 때만 하고, 혼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일부러 애써 열심을 다할 필요가 없었지요. 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고 말합니다. 상식을 뒤엎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상식을 뒤엎는 명령이 오히려 그들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치를 보며 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진짜 상전은 주 그리스도이셨고, 그분은 언제나 그들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일터의 진짜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상사가 우리의 상전이 아닙니다. 고객이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자리에 부르셨고, 그분이 우리의 일을 통해 이루실 일이 있습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만듭니다. 상사가 보든 말든, 동료가 인정하든 말든,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하는 마음으로 일하면 됩니다. 그 일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업무를 마주할 때 잠시 멈춰 서서 그 일을 주님께 드리는 예물로 올려드려 보십시오. 그저 처리해야 할 숙제였던 일이 주님을 향한 고백으로 바뀌는 신비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시고 상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시고 상 주십니다. 24절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 유업의 상을 받을 줄 알라.’ 당시 종들에게 상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눈치 보며 적당히 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지요. 그런데 바울은 ‘주께 유업의 상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상은 현금 보너스나 승진이 아닙니다. 더 귀한 것입니다. 영원한 유업,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기업입니다. 사람은 당신의 수고를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상사가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고, 동료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속상한 일이지요. 한 번쯤 ‘내가 왜 이렇게 애쓰나’ 싶은 순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드린 모든 수고를 하나하나 기억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고, 아무도 몰래 쏟은 땀, 그걸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그날이 오면 주님이 ‘잘 하였다’ 하시며 영원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사람의 눈치에서 자유롭게 만듭니다. 누군가 당신의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무심하게 지나칠 때, 그 서운함을 주님께 가져가십시오. 사람의 칭찬은 흩어지는 안개 같아도 주님의 기억은 영원합니다. 그분의 시선을 의지하여 오늘을 묵묵히 걸어가는 당신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 '이 정도면 됐지' 하는 계산이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눈에 띄는 만큼만 하고, 평가받을 만큼만 애쓰는 거죠. 하지만 바울이 이어서 25절에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의심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라.' 여기서 '의심하는 마음'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입니다. 상사가 보면 열심히 하고, 안 보면 슬쩍 쉬는 그런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라.' 두려움은 겁이 아니라, 주님이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경외심입니다. 당신이 오늘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가정에서, 교실에서 하는 모든 일을 주님이 지금 보고 계십니다. 그분 앞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천대받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께 유업의 상이 있다'는 말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주님은 인정하십니다. 아무도 갚아 주지 않아도, 주님은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그 상은 이 세상이 주는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상,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당신의 모든 걸음을 주님은 세밀하게 살피십니다. 사람의 평가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당신의 수고를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를 보내십시오.
결론 및 적용
오늘 말씀을 되새기며, 우리 함께 마음을 모아 봅시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일하는 것, 상사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것, 그 피로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건넨 말은, 그 피로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리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를 더 열심히 일하라는 압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람의 시선에서 눈을 떼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일터는 노동의 현장에서 예배의 자리로 바뀝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쟁취하려고 애썼던 그 쉼을, 주님께서 먼저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누리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 당신이 쏟은 시간과 노력을 가만히 되짚어 보십시오. 사람의 눈치를 살피느라 분주했는지, 아니면 주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으로 정직했는지 말입니다. 그 질문은 우리를 사람의 평가라는 감옥에서 건져내어 주님의 평안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잘하였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그 음성이 우리의 참된 안식입니다. 사람의 인정은 오락가락해도, 주님의 인정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밤, 사람의 인정에 목마르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 안에서 깊은 잠을 누리십시오. 내일 아침, 다시 주님과 함께 일터로 나아가는 당신의 발걸음이 가볍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안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일터에서 누군가 당신을 무시하거나, 당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 속에서도 '주님, 이 일을 당신께 드립니다' 하고 마음을 고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상사가 당신을 평가하는 잣대는 내일 바뀔 수 있어도, 주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합니다. 그러니 오늘 밤, 혹시 마음에 남은 서운함이나 억울함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여, 이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 한 일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그 순간, 당신의 어깨에서 짐이 가벼워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 가벼움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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