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유가 남의 불편이 될 때, 고린도전서 10장
설교 스페이스
시내버스 기사가 라디오를 틀어도 되는지를 두고 생각이 갈렸어요. '모두의 공간이니 소리를 강요하면 안 된다'는 쪽과 '긴 운전 시간을 버티게 해 주는 라디오까지 금지하는 건 지나치다'는 쪽이요. 나흘 동안 2500명 넘는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남겼고요. 잘잘못을 가리기 어려운 이유는 단순해요. 양쪽 다 틀린 말을 하고 있지 않거든요.
표면 아래를 보면
이 논쟁이 길어진 건 라디오가 중요해서가 아니에요. 내 권리가 곧바로 남의 불편이 되는 좁은 공간이라서예요.
청년들이 사는 세계가 대체로 그래요. 셰어하우스, 칸막이 없는 사무실, 알림이 24시간 열려 있는 단톡방까지요. 그 안에서 통용되는 문장은 하나예요. "그거 하지 말라는 법 있어요?" 규칙은 최소선만 정해 주고 그 위는 통째로 비어 있는데, 다들 그 빈칸을 규칙의 언어로 채우려 하죠. 그런데 권리 대 권리로 붙으면 결말은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고, 이긴 쪽도 관계는 잃어요.
교회 안에서도 같은 장면이 반복돼요. 예배 중 휴대폰, 소그룹에서 말을 길게 하는 사람, 청년부 단톡방의 밤 12시 공지요. 규칙으로 정리하려다 서로 서운해지는 자리들이죠. 그러니까 이 세대가 진짜 묻는 건 누가 옳으냐가 아닐지도 몰라요. 옳고 그름이 밝혀진 다음에도 우리는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느냐예요.
그래서, 설교로 푼다면
방향 하나. 가하냐에서 유익하냐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전서 10:23-24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고린도 교회의 질문도 '해도 되는가'였어요. 바울은 가하다고 먼저 인정해요. 인정한 다음에 기준을 유익과 덕 세움으로 옮기죠. 라디오 논쟁이 규칙으로 안 풀리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권리의 언어를 사랑의 언어로 바꾸지 않으면 계속 제자리거든요.
⚠️ 함정. 사소한 논쟁을 신앙으로 판정해 어느 한쪽을 옳다고 선언하지 마세요. 본문의 관심은 판정이 아니라 태도예요.
방향 둘. 옳아도 멈출 수 있는 성숙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로마서 14:19-21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누군가 걸려 넘어진다면 멈출 수 있는 것이 성숙이라는 말이에요. 좁은 버스 안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이 이 원리를 눈에 보이게 해 줘요.
⚠️ 함정. '무조건 참는 것이 사랑'으로 만들지 마세요. 긴 운전 시간을 견디는 노동자의 조건을 무시한 배려 요구는 또 다른 폭력이에요.
방향 셋. 배려는 성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립보서 2:3-4 · 개역개정 ⓒ 대한성서공회
바울은 남의 일도 돌보라고 말한 뒤 곧바로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보여 줘요. 배려가 착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따라 하는 일이 되는 지점이죠. 성격이 무던한 사람만 지는 게임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 함정. 겸손을 요구받는 쪽이 늘 약한 자리라면 그건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에요. 자기를 비우신 분은 힘을 가진 쪽이었어요.
🤖 아래는 '설교 스페이스'가 이 방향으로 뽑은 AI 초안이에요. 검증된 주해와 본문 위에서 생성했지만, 강단에 서기 전 목회자의 손질을 전제한 초안입니다. 그대로 읽는 원고가 아니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출발점이에요. 당신의 본문·부서·문체에 맞춘 원고는 설교 스페이스에서 만들 수 있어요.
[AI 초안 예시] 장년부 설교 · 고린도전서 10:23-24
자유는 사랑을 향합니다
서론
“시내버스 라디오, 틀어도 될까?” 이런 물음에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시내버스는 여러 사람이 함께 타는 공간이니 누군가 원하지 않는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도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 운전기사에게 긴 운행 시간을 견디게 하는 라디오까지 막는 것이 지나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양쪽 모두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내게는 작은 권리인 일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불편이 될 수 있고, 누군가의 편안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당해야 할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가?”만 물으면 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해도 좋은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까지 살펴야 하지요.
저녁 퇴근길 버스에서 한 승객이 휴대전화 소리를 크게 틀어 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법에 걸리는지 따지기 전에 옆자리 사람의 지친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쉬고 싶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권리와 배려 사이에서 마음이 멈춥니다. 내 선택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 선택이 옆 사람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가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비슷한 물음이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관련해서 성도는 어디까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지 묻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질문을 오늘 본문에서 다룹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유를 쓸 때 시선을 자기 자리에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옮기게 합니다. 내 권리가 어디까지인가를 따지던 마음에, 이 선택이 누구에게 유익한가라는 질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말을 따라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자유를 누리되 기준을 세우십시오
바울은 먼저 “모든 것이 가하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인정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사람의 규정과 눈치에 붙들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 안에서 양심을 따라 살아갈 자리가 있습니다. 무엇을 먹고, 어떤 일을 선택하고, 어느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할지 모든 문제를 사람의 말만으로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연륜이 쌓인 분일수록 소중히 붙들어야 할 자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말을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라고 덧붙이고, 다시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면서 자유의 기준을 세웁니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선택의 마지막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허락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밀고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자유는 손에 쥔 권한의 크기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권한을 어디에, 어떤 마음으로 쓰는지에서 드러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파트 주차 자리에 차를 세울 때 법적으로 선을 넘지 않았고 관리 규정에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차가 빠져나갈 길을 좁혀 놓았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내 자리에 세웠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사람의 형편을 살피면 차를 조금 옮기는 선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약한 사람에게만 참으라고 요구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정당한 권리와 쉼을 무시한 채 배려를 강요하면 그 또한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바울이 세우는 기준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사랑 안에서 다시 살피는 태도입니다.
장년의 삶에는 이런 선택이 자주 놓입니다. 직장에서는 오래 일한 사람의 방식이 있고, 가정에는 각자의 수고와 피로가 있으며, 교회에는 오랜 신앙의 습관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해 왔습니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누군가에게 숨 쉴 틈을 빼앗고 있다면, 자유를 사용하는 지혜가 더 필요합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믿음의 증거가 되면서 마음이 거칠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억지 규칙에 묶어 두지 않으셨습니다. 자유를 주신 주님께서 그 자유를 사랑의 자리에서 쓰도록 이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자기 뜻을 끝까지 관철하는 힘으로 굳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선택을 다시 살피는 지혜로 자라가기를 바랍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스로 물어보세요. 내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는 것보다, 이 결정이 내 곁의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먼저 헤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가정에서 내 방식만 고집하지 않고 가족의 형편을 헤아릴 때, 교회에서 익숙한 순서를 내려놓고 새로 온 사람의 자리를 살필 때 자유가 사랑으로 움직입니다. 말할 권리가 있어도 침묵이 공동체를 살린다면 잠잠할 수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어도 함께 걷는 길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자유를 이렇게 사용해 봅시다. 내 마음이 편한가만 묻지 말고, 이 선택이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지 살피십시오. 그때 자유는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2. 유익과 덕을 세우는지를 살피십시오
바울은 자유를 판단하는 자리에 두 가지 질문을 세웁니다. “이것이 유익한가?” 그리고 “이것이 덕을 세우는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따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선택이 사람과 공동체에 어떤 열매를 남기는지 살피게 합니다. 유익은 내 기분과 편의를 채우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가족의 믿음을 돕고 관계를 살리며, 교회가 서로 기대어 서도록 하는 데까지 넓어집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집을 짓는다는 그림을 품고 있습니다. 벽돌 하나를 올리듯 말 한마디와 선택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을 붙들기도 하고, 반대로 쌓아 올린 것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가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한 사람의 방식이 늘 기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수고한 사람이 자기 경험을 내세우고, 다른 가족은 말을 아끼며 따라갑니다. 그 방식이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누군가가 점점 입을 닫고 가족의 대화가 끊어진다면, 바울은 그 일을 유익하다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깁니다. 익숙한 순서와 내 취향을 지키는 일이 편할 수 있지만, 새로 온 성도가 예배와 공동체에 마음을 붙이는 데 걸림이 된다면 한 번 더 살필 여지가 있습니다. 내 방식 하나를 내려놓아 다른 사람이 믿음 안에서 자라난다면, 그 내려놓음은 손해가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섬김이 됩니다.
그렇다고 유익을 말하면서 누군가에게 무조건 참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계속 희생을 떠넘기면 공동체는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말해야 할 사람이 말할 자리를 얻고, 오래 수고한 사람이 쉼을 얻으며, 약한 사람이 홀로 짐을 지지 않게 하는 것까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유익은 힘 있는 사람의 편안함을 지키는 말이 아니라, 서로의 믿음과 삶을 튼튼하게 하는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자 고립된 사람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한 몸 된 공동체 안에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도 사람 사이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선택 하나가 누군가를 주저앉히는지 다시 일으키는지, 공동체의 문을 닫는지 더 넓히는지 살피는 지혜를 주님께서 기르십니다. 우리가 세우려는 마음을 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서로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집으로 사용하십니다.
결정하기 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내 주장이 공동체에 꼭 필요한지, 아니면 내 고집을 앞세워 누군가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족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됩니다. 교회에서도 내 의견을 관철하기보다 다른 이의 생각을 먼저 받아 적으며 함께 길을 찾는 모습이 공동체를 든든히 세웁니다. 작은 배려 하나가 오래 마음에 남고, 한 번의 양보가 공동체 안에 신뢰를 심습니다. 반대로 옳은 말을 하면서도 사람을 몰아세우면 그 말은 마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유를 사용할 때 내 권리만 바라보면 곁에 있는 사람을 놓칩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자유를 이웃의 아픔을 살피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며, 믿음의 길에서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키는 데 사용해 보길 바랍니다. 오늘 내가 내려놓을 수 있는 말 한마디와 방식을 하나 정해 보십시오. 그 자리에 사랑이 머물고, 하나님께서 그 작은 순종을 통해 사람을 세우십니다.
3. 자기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십시오
세 번째로 바울은 자유를 사용하는 사람의 시선을 자기 자리에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로 돌립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린도전서 10:2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유익은 자신의 삶을 돌보는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정과 일, 건강과 책임을 소홀히 여기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문제는 내 형편과 내 판단만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그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형편과 믿음과 앞날을 함께 바라보라고 합니다.
남의 유익을 구한다는 말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받아준다는 뜻도 아닙니다. 직장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할 때 한 사람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떠넘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침묵하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말할 것을 차분히 말하고, 서로 지킬 선을 세우는 일도 공동체를 살리는 유익이 됩니다. 반대로 내 방식이 더 익숙하고 내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여도,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누군가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내 권리를 잠시 내려놓고 다른 사람이 다시 참여할 길을 살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배려는 한쪽만 참고 견디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형편을 헤아리며 사랑으로 조율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을 깊이 비춥니다. 회의에서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내가 한 수고를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집니다. 그 마음을 주님 앞에 가져가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내가 옳은가?”에 머물던 마음이 “이 일을 통해 누가 힘을 얻고 다시 설 수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유익만 바라보던 사람이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리로 옮겨 가는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과 4절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도 돌보라고 권합니다. 그 말씀 뒤에는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품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 까닭은 성품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형편을 살피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유를 자기 주장으로 움켜쥐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말의 속도를 늦추고, 필요한 때에는 권리를 내려놓으며, 다시 설 때까지 곁을 지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자유를 이끌어 서로의 삶을 살리는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은 거창한 자리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식탁에서 말수가 적은 가족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일, 교회에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 곁에 자리를 내어 주는 일, 내 의견을 설명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걱정을 묻는 일에서 나타납니다. 작은 선택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나는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위로가 됩니다. 반대로 내 편안함만 지키려는 태도는 곁에 있는 사람을 조용히 밀어낼 수 있습니다. 나의 자유가 단순히 내 편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도구인지 매 순간 점검해 보십시오. 권리를 내려놓는 일이 손해처럼 느껴질 때도 주님은 그 자리를 사랑의 자리로 바꾸십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만나는 사람의 유익을 한 번 더 살피는 성도가 됩시다. 그렇게 사용할 때 우리의 자유는 공동체를 따뜻하게 세우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 주는 통로가 됩니다.
결론 및 적용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선택의 폭이 넓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유를 손에 쥔 사람이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내 권리를 지키는 일이 믿음을 세우는지, 내 말과 행동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는지 하나님 앞에서 살피게 됩니다. 때로는 내 뜻을 말해야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들으며 방향을 고쳐야 합니다. 사랑은 한쪽의 편안함만 지키지 않습니다. 각자의 형편을 살피면서 함께 걸을 길을 찾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 규칙에 묶어 두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선물입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 자유를 자기 만족을 채우는 권리로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을 살리는 데 기쁘게 내어놓습니다. 마음이 지쳐 자기 몫만 붙들고 싶은 날에도 주님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오래 쌓아 온 판단을 내려놓기 어려운 순간에도 사랑으로 다시 생각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 함께 선택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가’에 머물지 말고 ‘이 일이 누구에게 유익한가’를 하나님께 물읍시다. 우리의 자유가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도 답은 규칙 하나에 갇히지 않습니다. 시내버스에서 라디오를 틀 수 있는가를 따지는 마음이 곁에 앉은 사람의 평안까지 살피는 마음으로 자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를 사랑으로 이끄셔서 서로의 삶을 세우게 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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